육아는 자신의 그림자 영역과 만나는 극한의 상황 연속
이미 기록하고 글을 쓰는 것만으로 나는 여러 번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성찰하고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욱아일기를 쓰면서도 그랬던 것 같다. 오만한 생각,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화를 낸 순간을 기록하는데 설마 연재하면서 화를 또 내겠어? '달라진 나', '잘 참아낸 나'를 칭찬해 주고 환하게 웃어야지.
에필로그를 쓸 즘 나는 뭔가 화를 내지 않는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반 이상은 바뀌어버린 사람이 될 거란 기대도 은근히 품었던 것 같다.
욱아일기거리를 찾고 메모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며 아이들에게 화를 안 내고 좀 더 멋진 내 모습을 기대했는데 지난주 목요일 글을 발행하자마자 금요일 아침에, 그것도 학교 가는 아이에게 화를 냈다. 내가 안 하기로 다짐한 중 하나인, 등교하는 아이에게 나온 버럭, 화가 찾아오자 그날은 아이를 보내고 기분이 내내 안 좋았다.
《뇌내혁명》의 저자 하루야마 시게오나 《생명의 신비 호르몬》의 저자 데무라 히로시도 우리가 분노할 때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의 과잉 작용으로 몸속에 뱀독 다음으로 강력한 독이 퍼진다고 말하고 있다. 아 …! 강력한 독이 발끝부터 머리로 서서히 올라오는 듯했다.
이른 아침부터 내는 화는 그날 하루의 기분을 쥐고 있는 건 물론, 강력한 독기운에 화를 낸 나 자신을 제대로 붙들고 있기도 아득해진다. 물론 터벅터벅 학교로 향했을 아이의 마음도 마찬가지였겠지. 이성을 잃은 엄마와 달리 집 앞을 나서면서도
엄마, 잘 다녀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라고 습관적으로 말하고 나가는 아이라니. 나는 인사를 받아줄 정신은커녕, 그 순간에 인사까지 하는 아이 모습에 또 화가 났다. (뭐가 자꾸 이렇게 계속 화가 나!, 하면서도 화가 났다) 샹냥하고 순진한 아이의 인사에 퍼뜩 정신이 차려지다가, 내 행동을 곱씹어보다가 텅 빈 거실에 웃고 있는 아이 사진을 보는데, 눈물이 나왔다. 큰 아이가 집으로 오는 오후 시간까지 내내 저기압,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학원 스케줄도 제일 많은 날이라 6시 넘어 들어오는 아이를 기다리기까지 불도 켜지 않고 멍하니 우울하게 있었다.
나는 무너지고 무너져 내렸다.
길길이 그렇게까지 날뛸 일이었을까 → NO
그냥 보내고 나서 화를 내든지, 좀 참을 순 없었을까 → …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
간식도 못 챙겨주고 늦은 시간까지 배 고플 텐데 아이는 나를 원망할까 → YES
내가 진짜 원하는 거, 왜 화가 났는지는 묻지도 못할 정도로 부끄럽고 무서웠다. 자신 없는 대답조차 할 수 없는 겉도는 질문을 몇 번 하다가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할 수 있는 손기도, 쓰는 기도, 마음의 거울,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를 꺼내기까지도 이렇게 망설여지긴 처음이었다.
여기엔 거짓말을 할 수 없겠지, 란 마음이 제일 컸던 것 같다. 제일 중요한 것만 빼놓고 뱅뱅 돌려가며 엉뚱한 질문을 하는 나를 마주하면서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조차 사람은 자신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나는 내가 많이 바뀌고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사람일 거란 기대가 너무 컸구나, 지나치게 들떠서 더 중요한걸 자꾸 놓친 기분이 들었다.
일기를 썼다. 글이 만병통치로 나를 낫게 하진 않았지만 아이에게 다시 시작해 볼 첫마디를 적어나가고 있었다. 뻔한 사과가 아니라 이번엔 다르게 시작했다. 엄마 마음이 왜 이렇게 갑자기 화났는지, 엄마가 어떤 마음을 발견해서 이렇게 울컥하고 슬펐는지, 진짜 묻고 싶었던 질문을 거기엔 꺼내고 있었다.
나의 버럭과 뱀독 다음으로 치명타인 '욱' 하는 화가 번진 상처 투성이 일기장, 눈물범벅인 내 일기장과 작별을 고할 날일 내게 오게 될지는, 모르겠다.
전적으로 나의 문제인데 육아를 하고 너를 책임지고 키우는 이 마음에서 내가 아닌 '엄마'의 역할이 강조되고 압박된 사실이 때론 얼마나 힘든지, 한차례 정리가 됐고 아이가 돌아오는 시간이 무섭기도 하면서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날 저녁, 식탁에 마주한 아이와 깊고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함께 글 쓰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었다. 나만 이런 걸까, 나의 다짐과 글로 맺은 언약도 파스스 깨져버릴 정도로 순간의 화를 못 참아 학교 가는 아이에게 나의 화와 에너지를 쏟아내는 내가 과연 정상일까.
▶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는 말로 위로를 시작해 주신 알레작가님 이야기뒤로, 눈물 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이 말도 너무 울컥했어요. 우리 모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기에,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시작부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괜찮지 않은 순간에도 마법 같은 이 말은 하고 있어도 듣고 있어도 진정되는 효과가 있거든요.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스스로에게 해준지 얼마나 오래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 애 키우면서 욱하지 않은 분, 손? 없을걸요?
▶ 그럼 아마 자기 애가 아닐 수도 …. 저는 첫째랑 친하지만 지금도 아주 가끔 머리 쥐어뜯고 싸웁니다.
▷ 저는 애들 어릴 때 제가 미친X인 줄 알았어요.
푸하핫, 영글음작가님과 스타티스 작가님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읽다가, 빵 터졌다.
영글음 작가님의 한 방에 와닿는 표현, 그래, 맞아. 나도 그냥 나는 멀쩡해 보였는데 애를 키우면서 스스로 나를 미친X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잖아. 애를 키우는 사람인데 왜 자꾸 나는 내 모습이 미쳐있는 사람 같고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 육아는 자신의 그림자 영역과 만나는 극한의 상황 연속이에요..!
남의 애는 책임감이 없지만 나의 애는 이 아이를 제대로(?) 키워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도 실리기에 다를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사회에 나가서 혹시나 뭘 잘 못할까 봐 걱정도 되고 염려도 되고 불안감도 올라오고…
이어서 상담가이기도 한 스타티스 작가님의 말속에서 한 단어가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그림자
아, 아이에게 느낀 나의 불안이 좀 더 세밀한 언어로 나오는 순간 내 마음과 내 욕망이 보였다. 마음을 나눠주신 덕분에 나는 여태껏 내가 낸 종류의 버럭이, 욱하는 분노가, 사회에 나가서 혹시나 뭘 잘 못할까 봐 한 염려나 불안이 아니란 것도 확실히 알았다. 내 아이가 누군가에게 피해 끼치고 불편하게 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건 자명했다. 나도 알고, 아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아이가 내 바람보다, 꿈보다 그냥 더 또렷하고 특별하게 빛나는(보이길) 걸 원했던 거구나.
나의 근원적인 그림자, 불안을 지우고 상황해결과 대처에만 더 큰 포인트를 줬다면 사실 앞서 들여다봐야 할 내 마음, 다독이고 인정해야 할 것들은 그대로 찌꺼기처럼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들었던 '야무진 아이', '야물딱진 사람'그걸 내가 아이에게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다 뿐이지 아이가 그렇게 못해서 화가 난 적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물론, 저렇게 야무지지 못해서 늘 혼나는 아이였다. '좀 야무져봐라!'이 얘기를 많이 들었고 나조차 듣기 싫어서 아이들에게도 의도적으로 꺼낸 적이 없다. 표현만 안 했을 뿐 나에게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내가 넘어지고 늘 구박당했던 말로!
가슴이 아팠다.
내 아이를 남의 애라고 생각하라는 조선미교수님 프로젝트를 실시하자는 이야기도 나왔고, 오은영 박사님보다 그냥 좀 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던 조선미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육아를 거창하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밥 먹을 때 젓가락 하나 더 두고 아이랑 같이 엄마가 먹는 거 아이도 먹으면서 키우고 엄마 사는 방식 그대로를 보여주며 키우며 된다고, 육아가 어렵고 대단히 거창한 게 아니라고. 우리도 다 그렇게 컸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잘 자란다는 말.
아이에게만 모든 것이 초점이 맞춰지고 희생하는 육아는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힘을 빼고 일상 속의 내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이가 배우고 자란다면, 같이 살고 먹고, 자라난다면 사실은 나부터 변해야 한다.
나는 어디서부터 달라져야 하는 걸까.
어렸을 때 부모님 두 분 다 학구열이 높으시고 학습에 관심이 많으신 편이었다. 도움이 되고 좋다는 학원도 보내주시고 문제은행 같은 두꺼운 문제집 같은 것도 풀라고 사주셨다. 하지만 한 번도 계획을 짜고 어떻게 얼만큼씩 공부하는 요령을 알려준 적은 없었다. 나랑 한 살 터울인 언니가 한글을 엄청 빨리 뗐는데 그때도 숫자 8을 거꾸로 썼다고 방향을 반대로 그리지 말라고 양쪽에서 부모님이 막 혼낸 기억이 난다. 그때 언니가 다섯 살이면 나는 네 살쯤 됐을 텐데도 그 기억이 생생한 게 그 별거 아닌 숫자 8 사건을 보면서 눈치가 보여서 한글이나 숫자가 뭔지도 모르면서 종이에다 비슷한 걸 그리며 막 공부하는 척을 했다는 거다. 어린 마음에도 8은 이리 쓰나 저리 쓰나 눈사람 모양이 나오는데, 방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양이 똑같은데 왜 이렇게 혼내지? 이게 회초리까지 맞을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초리로 맞고 우는 언니 옆에서 나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아빠가 심하게 혼내면 엄마가 말릴 줄 알았는데 부모님 두 분 다 흥분해서 공부할 때 두 분이 한 팀으로 어린아이 한 명을 혼내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도 들고 속상했던 것 같다. 신뢰하고 믿고, 다가가서 안고 싶은 편안한 존재이기 보다도 나도 실수하지 말고 잘해야 잘 보이는 존재라는 인식을 먼저 했다.
나는 좀 다른 사람이 돼야지 하는 강박관념이 지나쳐서 아이를 낳고 '절대'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함부로 강요하거나 회초리를 들지 않겠다고, 잘 모르는 게 있다면 시작부터 단계를 가지고 어떻게 계획을 짜는지부터 알려주고 싶었다. 수용해 주고 안아주고 포용해 주고 오구오구 내 새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건 분명했는데 언어적으로 표현을 받고 말로 들어야 좀 더 안정될 것 같은데도, 늘 그게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느꼈으니까, 나는.
내가 못 받은 한쪽면만을 지나치게 받기 위해서 애쓴 흔적들이 한 번씩 울컥 올라올 때가 있었다.
나에게 지배적이었던 그림자, 내 생각들과 마주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서 주된 감정이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
물론 우리 부모님이 그림자와 아픔만 물려주신 건 아니다. 그 안에 지배된 주된 정서가 불안과 조급함 같은 것도 있었지만 이 길 힘과 나아갈 문제 해결 역시 부모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아쉽고, 조금은 어둡지만 나는 이런 순간이 싫었다는 걸 찾아보니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닿았다. 누구를 탓하려는 게 아닌, 나의 있는 그대로의 애쓴 흔적들과 상처가 가슴 아팠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 말이 더 중요하다.
같이 동등한 관계에서 따지지 못하는, 따질 수 없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라는 게 너무 복잡하고 미묘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저렇게 말할 것만 같다. 위의 저 말은, 내가 부모님께 숱하게 들었던 말이었고 아이들의 예상 대답은 내가 부모님께 꼭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으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욕심 많은 엄마에 대해서, 사실은 좀 더 여유 있게 사랑해주지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해 사과를 하는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재가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자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닦지도 않은 채 내 눈물을 하나씩 닦아주고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가 자꾸 우니까 나도 그냥 눈물이 나와요. 아까는 속상해서 아침부터 엄마가 너무 미웠는데, 엄마가 악마 같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부족한 나 때문에 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엄마 울지 말아요.
엄마, 내가 달라질게요.
나에겐 결국 부모님의 그림자로부터 온 어린 내가 채워지지 못한걸 과도하게 우리 아이들에게 쏟아붓고 거기엔 내 희생과 사랑이 들어갔는데도 아이가 학습이나 사소한 부분을 놓쳤다고 생각하면 그게 어느 순간 폭발한다는 것을 알았다. 감정에 따라 집에서 엄마 눈치 보는 게 싫어서 엄마 기분을 언니랑 늘 살피곤 했는데 나는 아예 화내는 욱과 버럭의 엄마가 됐으니, 불안정한 나의 유년이 보이고 과도하게 집착한 완벽주의 모습들이 곳곳에서 떠오르고 내가 그렇지 않은 털털하고 모자란 사람이란 걸 너무 잘 아는 한편, 그렇게 되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과 눈물 또한 흐른다. 죄책감에 오히려 나에게 사과하는 아이에게 있는 그대로의 네가 얼마나 멋지고 엄마보다 나은 사람인지 말해주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그래, 내가 들어본 적 없는 듣고 싶었던 말을 아이에게 해주면 그 그림자가 나에게 조금씩 사라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얼마나 더 많이 울고 넘어져야 하는 걸까. 길고 지루한 이 싸움을 끊어내는 법도 그냥 의지로만 될 일이 아니지만 멈출 수가 없다.
시작부터 잘못됐다. 시작부터 어긋났다. 욱아일기를 쓰는 나의 정체성이다.
욱을 멈추고 싶어서가 아닌 '옥'으로 다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질문이 아니라, 핵심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거기에 답했어야 한다. 다듬기 위해선 다듬어지기 전 내 모습을 알아야 깎여진 부분도 보듬고 살펴보고 나를 찾아갈 수 있다.
(그게 뭐라고,라는 말은 금물이다) 그 작은 찰나의 감정 속에 뭘 발견했기에 그거에 온통 사로잡혀서 너한테 소중한 아이보다, 네 안에 못된 자아가, 뱀 독만큼 강렬한 치명적인 분노가 튀어나온 걸까.
후련했을 때도 있지만 그럼 그때는 별 일 아닌 거다. 금요일 아침처럼 화를 쏟아내고도 눈물을 참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버텼을 때 나는 부끄럽고 숨고 싶었고 어떤 중요한 것도 스스로 묻길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감추고 싶은 내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겠다. 불같은 화는 결코 사람을 개운하게 할 수 없다. 내 안에서도 불과 에너지가 나가는데, 속이 타고 가슴 아픈 건 당연한 거다.
내 욕심을 아이에게 투영해서, 내가 끌고 가고 싶어서 벌인 무수한 욱이 얼마나 많은지 살펴봐라, 잘난 사람이, 더 대단한 사람이 끌고 가는 것 같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부모 자식 관계는 그렇지 못해도 '책임'을 지기 위한 자리기에, 부족해도 끌고 가야 할 무수한 상황들과도 부딪친다. 거기에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보고 배우게 해 주려면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
질문과 질문으로,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 기분이 드는 밤이다. 하지만 빛이 없으면 어찌 그림자가 생길까.
그림자를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어떤 아픔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 그 거울이 우리 아이들이라는 것만으로 어쩌면 감사한 생각도 든다.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나의 그림자 속에 어쩌면 진짜 내가 있고 지금도 용기 없고 부족한 엄마지만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을 찾아갈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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