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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에 가시 같은 '0'

폭싹 속았수다 | 자식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by 앤나우

요즘 화제의 드라마, 내 눈물 버튼이 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주인공 애순의 엄마 광례의 자식 사랑은 참 따뜻하면서도 애틋하다. 아이에게 투박하고 때론 모질게 밀어내는 듯도 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도 든든한 편이 돼준다. 거칠게 끌어당기는 모정, 그중 유독 한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명대사, 명장면이 워낙 많은 드라마지만 내가 꽂힌 대사는 지나가는 듯한 짧은 대사인데도 염혜란 배우의 표정과 더불어 자꾸 생각이 났다. '욱아 일기'를 연재 중이어서 그런가, 화가 나고 욱하는 순간에도 그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어린 애순이 엄마의 유일한 낙인 담배를 전부 물로 적셔 버리자, 뒤늦게 안 광례는 이글이글 표정으로 한 마디를 툭 내뱉는다.




명치에 가시 같은 X




애순은 잠녀 일을 하는 엄마가 폐도 안 좋은데 담배까지 피우면 아프고 병에 걸릴까 봐 늘 걱정하던 딸이었다. 광례도 그걸 알지만 화가 날 때마다 유일하게 속 풀어주는 '낙'을 없애자 화가 나면서도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저 말이 튀어나온다. 자식이, 웬수같은 딸이, 명치에 가시구나. 가장 중요한 가슴팍, 그것도 정 중앙에 답답하게 걸려 있는 큰 가시. 하지만 뺄 수도 없는 존재. 그래서 내 일도 아닌데 아이 일이라면 더 열받고 화가 나고 씩씩 콧김이 나오고 세상이 다 들썩이는 기분이 들게 하는구나.


중요한 건 광례는 어린 딸이 없는 자리에서 이 말을 혼잣말로 했다는 점이다. 상도 엎고, 가마솥도 차 버리고, 화가 나면 친구의 망태기까지 다 걷어차는 한 '성깔' 하는 광례였지만 자식에게만큼은 '욱'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녀가 욱, 버럭 화를 내고 악다구니를 썼을 땐 오직 한 순간, 자식을 지켜주고 찾아올 때였다.








영범의 엄마 부용은 귀한 자기 아들이 애순의 딸 금명이와 결혼하는 게 못내 억울해서 한 마디 빽 하고 지른다. 욱이 튀어나온 지점은 여기다! 고상한 외모, 부유한 부잣집 사모님, 누가 봐도 더 여유 있고 고상해야 할 부용은 자식 앞이고, 자식이 가장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들도, 곧 며느리가 될 금명도 위하는 마음이 없다. 그냥 자기만 제일 불쌍할 뿐.






너는 내 프라이드고!
내 인생이고!





나는 다 널 위해 그랬어.
널 위해 살았어.
너는 내 인생이야, 인생.




그런데 가난한 집 딸과 결혼하겠다는 자식에게 결사 반대하는 사모님들 입에선 전형적으로, 으레 튀어나오는 그 소리가 오히려 내 마음을 갈갈이 찢는 것 같다. 고상한 품위, 우아함, 온실의 화초를 말하는 사모님이지만 결국 저런 걸 강조하는 사람이 이성을 잃고 이상한 포인트에서 또 버럭을 하는구나, 터뜨리는구나. 밑바닥을 먼저 보여주고야 마는 망가진 모습. 자기 자식을 혼내는 것도 모자라 남의 자식까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런데 이게 꼭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무조건'부모가 바라는 길, 정해준 길 속에 자식이 그대로 착착 살아가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 듣다가 답답해진 금명이도 한 마디 한다.



그건 영범이 거예요.





나는(*영범이 엄마는) 왜 가 났을까


나 역시 저렇게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뭐, 저런 비슷한 표현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아직 아이들이 '프라이드'라는 말도 못 알아들을 것 같지만 자식이 '확실히' 내 '자부심'은 아니기에 앞으로도 저 말은 쓰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낸 몇몇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다.

너를 위해서 네가 기뻐할 걸 생각하며 이런이런 걸(희생을) 했다. 내 공부도 아닌데 '네'가 하는 공부를 도와주고 가르치고 '네'가 좋아하는 걸 기다리고 함께 봐주고 사줬다.


한 마디로 생색!


내가 아이들에게 많이 내는 버럭의 밑바탕엔 비루하지만 저 감정이 포함돼있는 것 같다. 내 친구도 아닌데 네 친구 만나는데서부터 '내 시간'을 쓰고 같이 놀(아주)고 어울린 유치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선택 사항이 별로 없는 작은 네가(어린 네가) 고른 것도 아닌 우르르 죄다 내가 정한 것들에 그렇게 생색아닌 생색을 내는 감정이 올라오면 화를 낸 후에도 머쓱해진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시 떠올리며 적기에도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기도 하다. 아니, 그전에 그냥 '내가 좋아서 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애초에 그렇게 하라고 누가 등 떠밀기보단 스스로 그렇게 해야 '마음 편하자고', '나 좋자고' 선택했던 게 아닌가!


아이들에게 한 번씩 화를 내는 자신을 돌아볼 때 전혀 화 낼 상황이 아닌데 자꾸만 왜 화가 날까, 이 생각을 많이 했다. 거기엔 나 역시 나와 너를 동일시했던 밑바탕이 있었다.


널 위해 했는데 '내 뜻'대로 안되서 화가 난거야!


나는 나, 너는 너인데.

우린 타인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무턱대고 갑자기 화를 내지 않는데 자식에겐 유독 그 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걸 느낀다. 이미 나랑 한 몸에서 품긴 했지만 탯줄을 자르고, 바깥세상에서 첫 공기를 마신 순간부터 아이와 나는 분리되고 서로 독립된 각각의 존재가 된 건데 자꾸만 착각을 하게 된다. 감정적으로 변하곤 한다.


아이는 정작 혼자서 밥을 먹어도, 넘어져 다쳤어도, 속상한 일을 겪었어도 그게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았을 때도 많았다. 오히려 속상한 일을 겪었는데도 그걸 막상 자기 탓으로 몰고 화를 냈던 나 때문에 더 당황하고 가슴 아파했다.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식 인생은 내가 겪은 게 아닌데도 내가 당한 것보다 더 억울하고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감정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도 그냥 혼잣말로 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걸, 내 가슴을 한 두대 툭툭치고 "명치에 가시 같은 것들"하고 대사를 떠올리며 묵묵히 넘어갔으면 좋았을걸,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애순의 엄마 광례는 자식을 두고 눈 감을 때까지도 자식만 생각하고 모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거칠고 입도 험했지만 한 번씩 툭툭 튀어나오는 모진 소리까지 자식에게 전달하진 않았다. 남들에겐 모진 말, 거친 말을 잘 뱉었지만 어린 애순에겐 힘이 되는 소리를 해주고 응원해주고 손을 잡아 준다.


영범의 엄마 부용은 부족함 없이 좋은 환경에서 영범을 키웠으나 영범을 그렇게 '키웠다'는 것에만 치중한다. 아들의 인생보단 자기가 짠 '인생 계획과 스케줄'이 더 중하다.


나는 어떤 엄마로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자식이 프라이드고 인생이고, 전부가 되선 안 되겠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 빛나고 귀한 존재는 맞지만 확실한 건 '나'는 아니다. 내 프라이드는 내가 온전히 느끼는 '나로인한 기쁨'으로 누리고 챙겨야 한다.





폭삭 속았수다는 제주도 방언으로 다양한 뜻이 있다.

1. 완전히 속았다 (부정적 의미)

2. 완전히 반했다 (누군가에게 빠졌을 때)

3. 고생 많았다 (격려와 위로의 의미)

『폭싹 속았수다』는 단순히 속은 것도, 고생 많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그 순간에 빠져버린 감정을 전달하는 말이기도 하다.


1. 자식이 아직도 온전히 자기 소유라고 생각할 때 (완전히 속았다. 대단한 착각!)

2. 자식에게 빠져 다른 상황은 안 보일 때 (자식도 그런 나에게 반했는가, 돌아보자!)

3. 고생 많았다 (이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나만의 작은 보상, 뿌듯함, 쉼을 누리면 이게 제일 좋은 거 아닌가?)

*원래 명치에 박힌 가시는 내 마음대로 어쩌질 못한다. 그걸 뽑으려고 버럭하고 난리 칠 수록 더 아파지는 것 같다.



아이들 키우느라 폭싹 속았수다.

자식에게 폭싹 속지 말고 명치에 가시, 툭툭 건드려져도 그걸 뽑아내는 게 또 자식 웃음이란 걸 믿으며 삽성~

아, 나도 제주도 방언을 잘하고 싶다






#너는너나는나

#엄마는왜자꾸네일에화가날까

#자식인생은자식꺼

#욱아일기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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