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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by 앤나우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진은영 시집 | 문학과지성사








나는 '은영'이란 이름을 좋아한다. 최은영, 김은영, 진은영, (모두 작가님과 시인의 이름이다) KCM의 '은영이에게'란 노래까지.

그래서 이 시집을 고른 건 아니고 신형철 문학 평론가의 글을 좋아하는데 뒤에 쓴 짧은 해설을 읽고 싶어서 주저 없이 골랐다. (이렇게 산 시집이 꽤 된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신형철이름은 까맣게 잊고 이 시에 푹 빠져버렸다.


청혼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혹은 먼저 결혼하자,라고 말을 꺼내 본 경험은?

>> 나 역시 청혼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여의도에 다리로 연결된 카페에서 지금의 신랑에게. 삐뚤빼뚤 손글씨로 채운 편지와 랑방의 marry me!라는 향수와(청혼하기에 적합한 향수 이름이다. 지금도 내 화장대 위에 놓여있다) 꽃다발 한아름과 함께 청혼을 받았다. 햇볕이 쨍쨍, 아주 더운 여름이었고, 땀을 많이 흘리는 신랑은 땀과 함께 눈물샘도 폭발했다. 내가 울어야 하는데, 먼저 눈물이 맺혀 글썽글썽한 신랑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터져버렸던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받은 청혼이라 더 놀랍고 신기했다. 잔뜩 설렜다가, 걱정하고 고민했을 마음, 신랑이 준비했을 시간이 안쓰러웠다가 나에게 정중하게 청혼해 주는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결혼하고 주재원으로 함께 두바이에 가서 살기로 했었는데, 모기 한 마리조차 살지 않을 만큼 사막의 작렬하는 태양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도, 했다가 40도가 넘는 대신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 시설이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혹하기도 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반전은 본인(남편)이 두바이에 다녀온 후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때려치웠다는 ;;; ㅋㅋㅋ
두바이가 자기랑 너무 안 맞는다며 다시 처음 관뒀던 회사에 재취업했던 비하인드가 ^^ 뭐, 그렇다.



*그때 이 시를 알았더라면 내가 먼저 이렇게 청혼해 줬더라면 좋았을걸, ㅎㅎ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멋진 시다.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주저하고 고민하고 있다면 이 시를 좀 더 여러 번 천천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러 번 읽어도 읽을수록 같은 마음이라면 주저 없이 고백하라고, 고백의 끝은 성공과 실패가 없다.


고백을 하냐, 안 하느냐의 '말과 행동'이 있을 뿐이다.


'결혼'이 인생의 무덤처럼 비유되는 세상에서 이토록 멋진 청혼이라면, 눈물 날 만큼 설레고 진솔한 고백이라면, 나는 시적화자와 화자에게 청혼받은 그 누군가가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았어도 황홀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누군가, 아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간질간질하고 단단한 고백을 받게 된다면, 그런 청혼을 받은 사람은 결코 이전과 같은 '나'일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쓰러지고 주저앉고 싶은 순간에도 나를 다시 일으킬 만큼 귀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마음에 와닿은 몇몇 구절

*이라고 써놓고 보니 전체 구절이 다 와닿네!




빠르게 변하고 흘러가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세상에서 '오래된 거리처럼' 익숙하고 길게 편안하게, 친숙하게, 늘, 한결같이 너를 사랑한다는 첫 구절부터 마음에 들어온다. 오래된 거리라는 구절 하나에 차분해지면서도 잔잔한 기분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불 같이 찾아온 감정이 아니다. 내 사랑은 오래된 거리 같지만 반짝이고 시끌벅적하고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와, 별과 벌을 이용해서 이렇게 시청각 모두를 깨워주는 멋진 구절이라니! 뒷부분에선 대구를 이루는 이 구절이 또 센스 있게 변주된다.


여름에는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순결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찾은 모든 맹세의 진솔함을 적어주고 싶어 한다. 통장잔고의 액수가 아니라, 내 능력치의 직업과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현재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나열은 하나도 없지만 (어쩌면 그래서 여자기 떠날 수도 있지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난 이 부분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씨앗을 자라게 하고 생명이 되는 비와 [생명의 시간],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까지 함께 할 시간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이제 등장한다.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시적 화자의 방황이 길었는지, 아팠는지 그것까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나'를 찾기 위해 헤매었던 적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아닌 왜 이런 시간을, 그것도 '돌려준다'라고 말하는 걸까. 이 구절은 곱씹을수록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고 들여다볼수록 더 큰 감동을 주는 구절이다. 제대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막막한 현실, 외로움, 눈물을 '돌려준다'는 구절에서 화자의 방황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어쩐지 이 구절이 너에게만큼은 내 가장 밑바닥, 감추고 싶었던 이런 것까지 꺼내서 보여준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절절하고 아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투명하게 그대로, 내 걸 감추지 않아도 다 내어주는 '과거와 현재, 보이지 않는 미래'의 시간까지도 전부 다.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서. 쓴 인생길, 고된 길이라는 걸 알아도 그래도 그 물컵을 기꺼이 마시겠다는 구절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전부 환하게 보여도 그 슬픔이 영롱하게 맑다는 걸까, 얼음이 아니니까 녹을 수 없는 유리처럼 그냥 박혀서 그대로 있어도 죄다 마시겠다는 의지일까.


중요한 건, 내가 널 오래된 거리처럼, 숨쉬듯 네 옆에서 한결같이 사랑한다는 그 마음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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