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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을 쏟아낸 후의 감정

쏟아버린 화를 주워 담을 순 없지만 치우는 일은 가능하다 ①

by 앤나우

아이에게 와르르 화를 내고 대부분 첫 번째로 찾아오는 감정은 '후회'이다.

그냥 좀 참을걸, 한 번 더 꾹 참고 견디고 이야기할걸.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가사처럼 내 안에 감정이란 것도 하나가 아니기에 쏟아내고 "버럭"했다고 순식간에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또 찾아보면 희한하게도 그래도 화를 내기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다.

욱아 일기를 쓰면서 돌아보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쓰는 건데 자꾸 합리화를 시키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도 같지만 사실은 '버럭 하지 않고도 이런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좀 적어보고 싶다.


◆ 그냥 좀 참을걸

하는 마음 한편에 이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 그래도 화내길 잘했어


감정을 전부 쏟아내고 표현하기 힘든 세상이다. 이 감정이 '화'가 된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매사 서툴고 부족한 어른이기에 어떤 쌓여있는 감정은 '화'로 터져 나와야 이야기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도 있다.








* 둘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개구쟁이였다. 크고 작은 사고도 많이 치고 응급실도 네 번이나 갈 정도로 늘 심장을 졸이게 만들었는데 첫째와 달리 눈치가 빠르고 5살 터울이라는 나이 차 때문에 아직 어려서 저런가 보다 하고 좀 더 쉽게 쉽게, 마음 편안하게 넘어간 적이 많다. 좀 더 붙잡고 뭔가를 같이 해줘야 했던 의무감에 시달렸던 첫째 때와 달리 편안한 것도 있었다. 스스로 주도적으로 놀고 (사고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러라고 해라~"지켜보면서 허허 웃는 여유마저 있었다. 에너지가 많아 바깥놀이를 좋아해서 지치지 않냐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히려 집 안이 난장판 되거나 뛰어다녀서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님, 할아버님께 죄송한 경우보단 탁 트인 평야(?)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뛰어다니는 순간도 좋았다. 문제는 놀아도 너~ 무 놀아서 집에 가야 할 때를, 발길 돌려야 할 때를,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돌아서질 않아서 애를 먹었지만. 놀이터에서 떼를 쓰며 뒹구는 아이에게도 궁둥이팡팡 한 대 제대로 때리지 않았다. 물론 화를 내고 혼낸 적은 있지만 무시무시한 천둥'버럭'이 나오기까지 인내심이 좀 나아진 듯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이 시기에 애꿎은 첫째에겐 화를 많이 냈는데 그건 결코 첫째의 잘못이 아닐 때도 많았다. 동생이 너무 어려서 타이밍이 엇갈리거나 동생 잘못일 때도 많았는데 두·세 살짜리 아이한테 뭘 혼내나 하는 심경일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 첫째는? 첫째도 겨우 초등학교를 막 입학한 여덟 살 아이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하는 어른인 것처럼 대했는지 붙잡고 내 말을 이해할 것 같은 큰 아이에게 쏟아낸 감정들이 미안하고 후회가 된다.



하지만 드디어, 무시무시한 '진노의 날'이 왔다. 화장실 변기에 또르르 뭔가 같이 휩쓸려 내려가는 재미에 빠진 아이가 눈을 빛내더니 하나씩 작은 장난감이나 물건을 집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배변 훈련을 막 시작한 2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작은 장난감이나 비누 같은 것은 그래도 괜찮았다. 목욕 중이나 배변 훈련을 할 때 도와주면서 옆에 있는 경우에도 그냥 보면서, 혹은 행동을 하려는 찰나 발견하면 바로 저지하거나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안보는 사이에 슬슬 하나씩 사고를 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변기가 막혔다! 아흑!


두둥! 하;;; 물이 내려가질 않았다. 어른들이 해결할 수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기에 뭔가 단단한 게 걸려있거나 막혀있는 모양 같아서 업자를 불러서 해결했다. 먹고, 자고, 싸는 거, 사람의 기본 욕구 충족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결핍돼서 조마조마한 모양이 얼마나 답답한 건지 깨달았다. 다행히 안방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급한 볼일은 안방에서 해결하면 됐지만 멀쩡한 더 큰 화장실을 나 두고 작은 화장실에서 해결을 하면서 스멀스멀 화가 올라왔던 것 같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를 붙들어서 묻기 시작했다.

대체 뭘 넣은 거야? 뭐가 들어간 건지 말해! 말하라고!


업체에 연락해서 기술자 분이 호스로 하나씩 끌어올려 막힘의 원인이었던 귀여운 모양 포크를 찾아냈다. 아이가 식사시간에 자주 사용하고 평소에도 애정하고 들고 다녔는데 어느 날부터 보이질 않더라니.


잘 해결됐는데 문제는 또 남은 비용, 10만 원 정도가 들었다. 기다란 포크 하나를 잘못 넣어서 갑자기 돈이 날아갔단 생각에 이성마저 잃어서 한편에서 눈치 보고 있는 아이에게 달려들어 궁둥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었던 '욱'이 튀어나왔다.




야!!
(*화날 땐 정중하게 이름이고 뭐고 호명하지 않는다)

화장실 변기에 왜 자꾸 다른 걸 넣냐고!
거긴 쉬 싸고 응아 싸는데야. 알았어?
물건 하나라도 다시 넣기만 해 봐!
엄마가 더 크게 맴매할 거야! 알았어?




배변 훈련은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으면서 변기 앞에서 살살 눈치 보다가 쉬도 싸는 척만 하고 아이가 여태껏 한 행동들이 떠올라서 더 화가 났다. 포크를 보고 저 기다란 포크를 왜 저기에 넣을 생각을 한 거지? 도무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고 막혔던 변기로 짜증 났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결국 이렇게 막혀서 지갑이 털리는구나, 그 순간 폭발했던 것 같다.


날카로운 포크가 참고 쌓아왔던 내 감정의 어딘가를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말도 못 하는 아이가 눈물 콧물 범벅인 채 뭐라 뭐라 안 하겠다고 말귀를 알아들은 건지 뭔지 간신히 대답을 할 때, 큰 아이가 '동생 그만 때려요'하고 내 손을 잡았을 때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내 품에 엎드려서 맞고 있다가 다시 아빠에게 후다닥 달아나는 아이. 울먹이며 엄마의 만행을 이르기에 바쁘다. 아이를 안고 달래주는 신랑은 이제 해결됐으니 괜찮다고 허허 웃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궁둥이를 사정없이 때린 내 손을 멍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밖에서 놀 때도 위험한 상황에 말을 듣지 않을 때도 화를 내고 반복해서 말했지, 손이 올라가진 않았는데 나는 뭐가 그렇게도 화가 난 걸까?


기본적인, 평범한 생활이 무너졌다고 여겨졌을 때 평상시와 다른 화가 났다.

처음 작은 물건을 반복적으로 넣었을 때도 혼냈음에도 '더 크게 혼을 내지 않아서' 아이가 저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 또 화살이 나에게로 ←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아이의 실수, 사소한 잘못 하나가 유별나게 보이는 것이 정말 내 탓일까? 이런 질문에 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이

돈이 나가고 생각보다 많은 지출에 버튼이 눌려진 것이다.



화르륵!



몇 년이 지난 오늘, 다시 똑같은 과정으로 감정을 떠올려 봤다


기본적인, 평범한 생활이 무너졌다고 여겨졌을 때 평상시와 다른 화가 났다.

평소와 달리 화장실을 활용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안방 화장실을 쓰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으로 적응하기보다는 성급하게 '더 빨리'해결을 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도 발동했다.


처음 작은 물건을 반복적으로 넣었을 때도 혼냈음에도 '더 크게 혼을 내지 않아서' 아이가 저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행동과 나의 '훈육', '혼'과의 연관성은 별로 없다. 강하게 당부했음에도 아이를 24시간 졸졸 따라다니는 게 아니면 당연히 요리하거나, 내가 빨래를 개고 집안일을 하는 어느 순간에 아이는 언제 어디서든 사고를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혼을 내고', '버럭'했다고 아이가 또 고분고분 바로 달라지고 말을 들었을까.

버럭 하고, 욱 한다고 아이는 바로 말을 듣지 않는다. 혼나는 상황을 눈치 보고 떠올릴 뿐 모르는걸 '알려주고' '설명해서'이해될 때까지 돌보는 게 나의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 또 화살이 나에게로 ←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화살을 나에게로 돌릴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경험을 통해 호기심과 즐거움을 찾는 시기의 아이가 그냥 사고를 친 '일',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뿐이다.

안 일어났으면 좋았겠지만 일어났고, 다친 사람도 없었고, 결국 해결했다. 해결할 수 있는 사고였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결국 아이의 실수, 사소한 잘못 하나가 유별나게 보이는 것이 정말 내 탓일까? 이런 질문에 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이

유별난 개구쟁이긴 해도 아이의 기질, 성격, 특성도 있으니 당연히 내 '탓'만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 시기에 친정 엄마로부터 '먼지 나게 두드려 맞아야'말을 듣게 생겼다는 말이 내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계속 꿈틀거리지 않았을까. 더 어렸을 때 고집을 꺾어야 한다, 성격을 바꿔줘야 한다, 이런 말을 엄마로부터 꾸준히 들으면서 어쩌면 나 스스로도 '나에 대한 양육태도'를 계속 자책했던 건 아닌가 싶다.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들리는 말이, 그 영향력이 실로 어마어마하고 크다. 원래 그냥 내 방식과 하던 대로 키웠으면 될 일에도 여러 소리, 그것도 제일 가까운 사람의 말이 들리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아, 나를 아껴서 이렇게 대놓고 말해주는 거겠지? 남들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차마 입으로 못 꺼내는 걸까? 그럼 더 심각하게 말 안 듣는 아이가 되기 전에 '무법자'가 되기 전에 내가 뭐라도 해야겠다! 이상한 결심과 다짐이 결국은 실천까지 이르렀다.


돈이 나가고 생각보다 많은 지출에 버튼이 눌려진 것이다.

돈이 나가지 않았어도 아이를 심하게 혼냈을 것 같다. 비용이 치러진 결과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그냥 그 결과가 눈앞으로 보였을 때 나도 어쩌지 못한 주체 못 한 화가 화르륵 올라왔던 거니까.

어쩌면 더 깊은 내면은 굳이 보여줘야 할 필요가 없는 '변기'뚜껑을 오픈해서 내용물이 꺼내져서 다 낱낱이 드러냈다는 '자체'가 아닐까.






세 번째 감정부터 멘털이 이미 흔들리고 자책과 회환이 들면서 참을 수 없는 화가 활활 타올랐는데 어쩌면 진짜 정답은 네 번째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일 '중요한 질문'을 했음에도 나는 이걸 다시 따져서 돌아볼 여유나 시간, 일분, 아니 삼십 초의 기다림 조차 없었다. '겨를이 없었다'는 말은 이럴 때 꼭 어울리는 말이 맞다.


나의 모든 태도가 이렇게 아이가 실수하라고 응원하라고 부치긴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결말에 다다르게 됐을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것도 이성을 잃으려면 늘 '죄책감'이란 감정에 빠지고 거기에서 '나에게 화가 난 상태'가 돼서 이성을 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책의 고리를 끊으려면 평상시 듣는 언어를 내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나의 생각도 그랬어야 했는데 '나는 아이를 때리라고 말해주는 말이 싫어! 그만 말해!'라고 반응하는 한편 어쩌면 때리지 않아서 이런 아이가 된 걸까?라는 의심이, 마음 한쪽에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팔랑귀고 말에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이기에 이게 나임을 먼저 인정하고 나도 나를 알아야 한다.


그날 맞은 궁둥이가 좀 아팠던 모양인지 둘째는 그 뒤로는 변기 근처에 어떤 것도 넣질 않았다.

충격요법을 제대로 썼다고 나의 버럭과 욱, 맴매로 이어진 단계를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아이를 울려서, 혼내고 나서 마음이 더 안 좋았기에, 옆에 큰 애가 있는데도 몰랐고 혼내는 중에 말리기까지 했는데도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에 한참이나 속상하고 가슴이 아팠다.


육아를 하면서 갈팡질팡 흔들리고 뭔가 줏대 없고 일관되지 않은 내 모습에 스스로가 '낱낱이 바닥까지 드러내는'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많다. 아이의 실수, 행동 하나에 사실은 그간 쌓였던 이런 나의 불안과 조급함이 화학반응처럼 맞물려서 폭발한 기분이 든다. 소리만 지른 게 아니라 여기에 나의 '손'이 아이의 신체까지 때렸을 때 기분은 몇 년 전인데도 여전히 속상하고 가슴 아프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기도 했는데 폭력으로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 나의 손, 동시에 더 날카롭게 퍼졌을 말과 상처들을 감정 하나로 바꾸게 할 수 있다면 다시 주먹을 쥐고 다짐해 본다.



후회가 더 컸던 첫 번째 경우이다.








두 번째 ◇ 그래도 화내길 잘했어 반응은 분량 조절 실패로 이번 주 목요일에 만나용 :)





#욱아일기

#버럭쏟아낸뒤두가지감정

#궁둥이팡팡

#말귀도못알아듣는아이에게

#후회되는감정

#2탄은곧이어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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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