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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안개 속에 선 거인

by 앤나우

앙상하다

(누군가 ㅡ 투욱,)

하늘 중간에 엉성하게

다 발라먹은, 삐죽삐죽한

생선 가시를 걸어놓은 듯하다


분명 뼈대만 남은 모습인데

옷도 입지 않고

살까지 난도질당한 모습인데


당당하다


누군가에게 진액이 다 빨린 모습인데도

살아있다

산다


미동 없이 살아왔다

꺾이지 않는 한 살아갈 것이다


베어져도 보이지 않는 땅 속 아래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죽어도 살아난다


죽음, 그 끝에도 생명이 흐르고

이야기가 흐르는 나무

겨울나무


꺾일 듯 꺾일 듯 휘청대는 꺽다리 모습인데도

꺾일 수가 없다

꺾을 수가 없다


뒤엉킨 머리카락 같은 뾰족한 나뭇가지


실보다 가느다란 얇은 가지 하나하나가

모세혈관처럼 팔딱거린다

얇은 혈관 끝까지도 공급되는 피가


거대한 겨울의 이파리를 만든다


어딘지 모르지만 위로만 위로만 뻗어간다

누군가 반응해주지 않아도

오라고 마중하지 않아도

조금씩 자라난다


뿌연 안개도

너를 다 떨궈내고야 마는 바람도

거인의 성장을 멈출 수가 없다


겨울나무는 헐벗어도 얇은 가지로 거대한 이파리를 만든다


안개 속에서도 저 혼자만 우뚝

스스로 이정표가 되는지도 모르고 한 곳만을 향하여

서서 잔다


선 채로 꿈을 꾸고

서서 노래한다 춤을 추다

서서히 겨울 안개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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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가 찍고 엄마가 쓴 시 | 산책길에 헐벗은 나무가 웅장하고 쓸쓸한 거인같이 느껴졌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아이들과 한 번씩 외출하는 시간이 즐겁다. 우리 가족들은 주말마다 동네에서 가까운 공원을 꼭 두 번씩 나간다. 일산에 이사 와서 가장 좋은 건, 집 근처 넓은 공원들을 우리가 전세 낸 것 마냥 다 쓰고 있을 때다. 타닥타닥, 식구들이 달리기 하고 걷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릴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딘가 황량한 공간에 내던져진 기분도 들고 모든 걸 누리는 자유를 얻은 것 같은 기분에 설레기도 한다. 아무도 없기에 더 오래 천천히 우리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있다. 핸드폰을 들고 오지 않은 큰 아이가 가끔 내 핸드폰을 빌려서 풍경 사진을 찍는데 우연히 다시 보니 왜 이런 사진을 찍었을까 궁금해졌다. 마구 뻗어서 위로 올라가는 담쟁이, 벽에 난 금, 빨랫줄, 앙상한 나뭇가지, 일반적으로 예쁘다거나 감탄이 나오는 풍경은 아니지만 선재의 사진은 어딘가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어딘가 조금은 어둡고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매력이 느껴졌다. 아이에게 이 사진에 대해 물어보니

-안개 속에 마구 뻗은 가지가 너무 멋있어서, 꼭 거인처럼 우릴 지켜주는 것 같아서

찍었다고 했다.


땅에서 자라는 나무 자체의 생명력을 겨울엔 못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서 나무도 버티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사실 나무를 땅 속에서 자라는 게 아닌, 하늘에서 누군가 잡아주는, 걸쳐놓아 주는 존재로 뭔가를 써볼까 하다가 발상만 떠오른 걸 메모해 두기로 하고 습작시를 이어가기로 한다.




#습작시

#겨울나무

#안개낀날오후산책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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