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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Mar 10. 2023

음... 내 소원은요,

-아이처럼 말하기,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을 쓰다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할지 몰라도 저는 그래도 통일이 되면 좋겠어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어렸을 때(아니다, 지금이 어린이지!) 진짜 엄청 열심히 불렀는데 요즘엔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더라고요. 어렸을 때 남과 북이 철조망 하나로 그냥 선만 그어졌는데도 갈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무슨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교과서로 수업 시간에 배웠어요. 하루아침에 다리도 끊어지고 갈 수 있는 기차도 두 동강 나고 자동차도 버스도 폭발한 전쟁이 일어나서, 그것도 새벽에 일어나서 다들 쉬는 날 새벽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했대요. 제가 본 사진은 다리 위에 좁은 손잡이? 난간 같은 곳으로 사람들이 막 기어올라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풍경이었어요. 좀비 떼를 피해서 달아나는 영화의 한 장면 같더라고요. 거기로 걷다간 물에 빠져서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끼리 꼭 붙들고 같이 자고 피난 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가족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겠죠. 아니다, 그러다 손을 놓쳐 잃어버리기도 했다니까. 전쟁이 진짜 싫어요! 잠시 떨어져 이동하거나 아니면 놀러를 가거나 돈을 벌러 간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그냥 평소 날과 다른 이동이었을 뿐인데 눈을 뜨자마자 돌아갈 고향과 집이 없어진 거예요. 무서운 군인 아저씨들이 선으로 이어진 그 철조망 앞에 딱 지키고서는 그냥 못 가게 하고 가면 안 된다고 생떼를 부린 것 같은 일, 저는 이해가 안 가요.

왜 못 가요? 바로 몇 발자국 앞이 자기 집인데 자기 집에도 식구들 보러도 못 가나요? 전쟁이 났다는 하루 만에 그렇게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생겼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고무줄 넘듯 가볍게 왔다 갔다 오갈 수 없어도 자기 집에 갈 기회는 줘야 되잖아요. 물건은 못 챙겨도 가족들도 보고 사람은 챙겨서 나와야죠! 저는 이산가족이 만나는 영상을 텔레비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너 누구냐, 요기에 점이 있고 얼룩이 있냐, 어디서 몇 살에 무슨 나무가 있었냐 자기들만 알 수 있는 추억을 이야기했지만 그 몇 개 없는 추억조차도 너무 어린 시절이라 전부 금방 동나고 말았어요. 대부분이 기억은 짧고 흐릿한데 얼굴을 보면서 드는 내 생각은

닮았따! 진짜 똑같은 얼굴이야. 이 사람 얼굴이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면 저런 얼굴일 거 같아.

거울 속에만 들어있을 그 얼굴을 보면서 나와 닮은 흔적을 찾아서 얼마나 그리워하고 슬퍼했을까요.  몇 십 년간 떨어져서 어린 자식이 부모를 찾고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면 그곳에 다른 혈육을 찾는 자료들을 보면서 나는 이산가족도 아닌데 엉엉 울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앞에서 어른들이 나와서 노래 부르라고 하면 춤도 추고 노래도 곧잘 불렀어요. 주현미 아줌마의 '밤 비 내리는 영동교를~'이런 노래 가사 뜻도 모르지만 손짓까지 따라 하면서요. 어른들이 잘한다고 칭찬하고 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줬거든요. 그런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학교에선 그런 걸 부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 '동구 밖 과수원 길', '아빠와 크레파스'같은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 음악이 저한텐 제일 건전하고 좋은 노래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마다 분위기가 어찌나 축축 쳐지던지 다들 와와, 하는 호응도 못하고 박수도 안쳐주고 엄청 급 다운된 썰렁함이 감돌았지만 노래가 시작했으니 어찌 됐든 전 끝까지 불렀어요. 아빠와 크레파스 같은 건 단조라 음정도 뚝뚝 떨어지고 가사도 좀 유치하긴 하잖아요. 코끼리가 막춤추기도 하니까. 또 멜로디까지 무섭기도 해요;;;  통일은 그래도 좀 희망이 있지 않나요? 개똥벌레나 등대지기도 알았지만 전 목소리를 '음음' 가다듬고


  우리의 소원은~

노래를 시작할 때가 좋았어요.  좀 더 커서 어떤 친구가 아기염소라고 빗방울이 뚝뚝 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그런 노래 부를 때도 그 아이도 그 노래 부르고 한 학기 가량 친구가 참 없었는데 제가 또 통일과 크레파스를 부른 주인공답게 그 친구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괜히 가서 걔한테 같이 뭐 사 먹자고 하고 했다니까요. 이런 말을 어려운 말로는 유유상종, 끼리끼리 동병상련이라고 한다죠? 아아, 참참. 제가 원래 말하다가 다른 이야기로 자꾸만 새는 버릇이 있어요. 저 엄청 수다쟁이죠?


사실 그때  후렴구를 부를 때쯤엔 다 같이 단체로 합창이라도 할 줄 알았나 봐요. 이 겨레, 이 목숨, 같은 가사가 저도 쫌 군대 같고 그랬는데 부르다 보면 웅장하고 뭔가 그런 울렁울렁 한 마음이 막 들었어요. 그렇다니까요. 진짜 통일을 잊지 않고 계속 계속 말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길을 잃고 미아보호소에 잠시 있었던 그 짧은 기억도 저는 너무나 슬프고 무서웠는데 우리 엄마, 아빠, 언니까지 평생을 못 본다고 생각하면 전쟁 그 상황이 아니라 홀로 남겨지고 떨어진 자체가 바로 지옥이 아닐까요. 누가 날 돌봐주고 챙겨주고 같이 잘 때까지 수다 떨어주나요? 나한텐 우리 식구가 온 우주이고 전부인데 항상 떨어지고 강제로 헤어지는 사실이 무섭고 슬펐어요. 상상만으로도 싫은 일을 겪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통일을 안 시켜주는 거죠? 누가 시켜줘야 하는 거 맞나요? 그냥 만나면 안 되는 거죠?

초등학교 때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금강산 구경도 하고 관광도 하고 거기 북한 음식도 먹어본 친구들이 몇 명 있었어요. 남북정상회담이란 걸 열고 이산가족들을 왕래할 수 있게 나라에서 서로 손을 잡고 짠, 건배하는 모습들도 보였어요. 내 친구는 아주 큰 유람선도 타보고 무슨 꿩고기 들어간 국물의 냉면도 먹었는데 북한 음식이 다 맛이 없다고 했어요. 알 수가 있나요, 내가 실제로 먹어봤어야죠. 저는 아니지만 궁금해서 전쟁 나던 시기에 갓난아기였던 아빠에게 물어봤어요. 아빠는 그때 2살도 채 안된 아가였지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 사람들이 전부 무서워서 총소리도 화약소리도 전부 처음이어서 커다란 바위에 엉덩이만 내놓고 덜덜덜 떨었대요. 우리 아부지 때만 해도 전쟁 중 태어나고 겪은 분들도 있을 텐데 돌아가신 할머니도 북한 땅을 밟아보고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지. 울 할아버지는 사진 한 장 가질 수 없었는데 우리 아빠를 임신 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럼 전쟁 중에 돌아가신 게 아닐까요. 할머니에게 너무 슬픈 이야기라 묻지 못했지만 저는 유복자, 아빠가 전쟁 시기쯤 '유복자'라는 말을 들었어요. 어려운 말이지만 전쟁을 겪지 않고 글로 배운 세대지만 그 말이 너무 슬펐어요. 울 아빠는 얼굴도 모르는 아빠가 꿈에 나왔다면 기분 좋게 웃은 날도 있고요. 어딘가 우리 할아버지 나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또 다른 친척들, 가족들,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 친구들이 닿으면 갈 수 있는 저 거리 너머에 있는 건 아닐까 상상을 하곤 해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오라.

저는 그래서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후기 : 지금도 통일 이야기를 꺼내면 주변에서 비웃음을 받을 때가 많다. 지나친 '이상주의자'라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지나친 '이상주의자'. 그래 나는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도 이상주의자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아이들은 얼마나 종종,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가? 현실과 동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때그때 감정의 소중함을 더 잘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얼마 전엔 신랑과 같이 차 안에서 군대 이야기를 하다가(아들만 두 명인 나는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기에) 늘 군대를 가야 하는 현실 이야기에 진지하다. 그러다가 대화 중에 '주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군대에선 주적을 북한이라고 가르치는구나. 그래 지금도 전쟁이 종식된 게 아니고 잠시 '휴전'인 상태니 아직 5살도 안된 군대 갈 생각을 걱정하면서도 군대에선 뭘 배우고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는데 그곳엔 현실이 있고 방어를 하고 지켜야 하고 공격을 하는 훈련을 받겠구나. 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축 늘어지고 반나절이 우울했다. 아직도 저 너머 땅에 내 식구들이, 자식이, 부모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점점 이렇게 통일 노래도 잊고 너는 너, 나는 나, 현세대를 살아가다 보면 이게 더 편하고 좋아지겠지. 이제 그 세대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사라지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 거고, 통일을 마치 우리가 더 손해 보고 품어야 할 것처럼 보는 시각에선 '하나'의 민족과 삶은 잊힌 지 오래다. 신랑은 군대에서 철저히 배운 덕분에 북한을 상대로는 주적! 북한 주민들은 불쌍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이 나라 이 땅에 대한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런 말에도 고개가 끄덕끄덕. 더 이상 찾아야 할 이유도 합쳐져야 할 이유도 없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도 흐르고 혼자서만 이북을 찾을 수도 없고 남한을 그리워할 사람도 없으니.
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 봤던 교과서 속 피난민의 모습과 우리 아빠의 전쟁 이야기는 잊히지 않는다.

*이제 40개월에 가까운 둘째가 말문이 폭발적으로 트여서 요즘 부쩍 재잘재잘 질문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아이와 대화를 주욱 이어서 써볼까도 했지만 거기에 담긴 나의 아이 같은 모습은 발견할 수 없어서 어린 시절 나를 떠올리며 써봤다. 혼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뭉클해서 눈물을 뚝뚝 흘린 내 모습은 오버스럽기도, 천진하기도, 웃기기도 하다.




글쓰는 오늘 Season 10 우리들의 글루스 II

'어린이처럼 쓰기' /후기

네 번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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