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그림이 있다
헌 벙거지 모자로 낯을 가리고
조금의 그늘로 땀을 씻고는
신작로 따라가는 작은 대열
그 끝에 걸린 그림자
군용 도라꾸가
흙먼지를 덮어쓰고
신작로 넓은 품으로
시원한 구름의 자유로움
까망머리 계집애가 따르는 그림
그림 속에 그림으로 그려진다
뭉쳐진 응어리 풀고자
바람에 날려 가는 기울은 달이
소복이 받아 담은 냇물로
손 씻고
낯 씻고
발을 씻는다
동그라미 일그러진 달
짝사랑 풀어놓은
이유 없는 까닭에
달은
그저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다
세상을 모두 담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혹은 그 속에 사랑을 담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나처럼 내 그림 속에다 내 사랑들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른다.
첫사랑의 그 아련함이 이젠 또렷하지가 못한 이유도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내 기억이 흐릿해진 까닭이다.
내게 첫사랑은 유년의 시절 같은 반의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이 좋아서 주말이면 몰래 교회 옆 담장에서 그 아이를 보았고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달려서 집으로 돌아와 내방에서 쿵쿵거리는 가슴을 나무라며 내 심장소리를 들은 건 아닌지, 날 본 걸까? 아닐 거야. 하며 나를 쓰다듬었던 예쁜 추억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아마도 첫사랑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부족하다. 그래 이건 내 첫 짝사랑이야 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이것도 내 삶 속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이 아닐까.
한여름
색깔 끈끈한 유화
그런 사랑 있다지만
드높은 가을 하늘
수채화 같은 사이
이런 사랑도 있느니
피천득 님의 이런 사이
정작 첫사랑은 기억도 나지가 않는다.
아니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내 마음이 그 기억을 꼭꼭 숨겨버린지도 모른다.
그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때론 지우개로 지우기도 또 때론 덧칠을 하여서 그 기억을 숨겨 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을...
나는 내 마음이 숨겨둔 기억을 가끔 찾아내려고 노력을 많이도 하지만 그 기억은 마치 지우개로 말끔하게 지워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가슴 아픈 사랑이 첫사랑이라 하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아름다워 꼭 안고만 살아가는 사랑이기도 하다.
오늘도 우리는 그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그림을 저기 저 무명 화가의 그림처럼 기교는 없더라도 아름답게 그리려고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얀 캔버스에 사랑이라는 그림을 오늘도 그리려고 예쁜 색의 물감을 이리저리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이 사랑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 인생도
틀릴 때마다
이렇게
덧칠하고 또
덧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림은 위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