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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천군작가 Jun 14. 2016

내가 너를 부를 때...

내게 온 그날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온 밤

연습장 가득하게

당신의 이름을 적었다.

잊을까 두려워서가 아닌

내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

긴 밤을

그렇게 검은 잉크로

매워간 것이다.

당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지금

나는 당신의 그림자로

당신의 쉼터로

살다

잊었던 당신 이름 하나로

다시 안아주며

사랑해 라고 말한다.

내게 온 그날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사랑해라고 말한다.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 이름보다 그 수식어에 익숙해져서 일 것이다. 누구의 엄마가 되어버린 너는 내게만은 누구가 되고 싶어 한다. 나는 그런 당신인 사랑스럽다. 누구 씨.라고 혹은 누구야 라고 부르는 내게 어른들은 한결같다. 애기엄마를 그리 부르냐고. 그럴 때면 나는 씨익 웃으며 " 저를 부를 때 누구 아범이라고 안 하시잖아요 누구야 라고 하시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누구 엄마가 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니까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아버지도 엄마 부를 때 여보보다는 누구야 라고 하시잖아요" 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나의 거울은 언제부터인지 아버지였다. 나의 미래 모습도 아버지의 지금 모습이고 싶어서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이름 부르길 좋아하신다. 며느리들에게 늘 똑같은 마음으로 누구야 라고 불러 주신다. 난 그것이 너무 좋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하며 산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여보라는 단어가 참 어색하다. 그래서 핑계 삼아 이름을 부르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부르면 나는 아직도 연애 중이라 여겨진다.


누구 씨.


학창 시절에는  자를 붙이는 것이 참 어색하기만 했다. 특히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내 입에는  자가 붙어 어색하지 않은 시기가 와 버렸다.

첫 데이트 때, 혹은 첫 미팅 때 어색하게도 나는 누구 씨라고 불렀다. 뭐 달리 처음 만난 사람에게 누구야 하기도 그렇고 처음 만났는데 애칭이 있을 리 만무하니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불렀다. 당연한 것 아닐까?

딸아이의 엄마와 연애시절도 그랬다. 누구야 라고 불렀다. 지금은 누구 엄마라고 저장이 되어있지만...

그 이후로는 이름으로 저장이 되어있다. 모든 사람들이.

낚시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닉네임이 더 편하다. 하지만 나는 그 닉네임 뒤에 꼭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입력을 한다. 그건 나만의 법칙이다. 어떤 법칙? 만약 우리가 70살 정도가 되었다고 가정을 해 보자. 그때도 잠수부님 혹은 쏨뱅이님이라고 부르기엔 우습지 않은가. 이 말을 하는 중에도 나는 웃고 있다. 그래서 누구 씨라고 부른다. 그래야 나이 많이 먹은 후에 웃으며 누구 씨 닉네임이 쏨뱅이였지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님의 꽃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 사람 좋아할 거예요. 나이를 먹을수록 이름의 소중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럴까? 남자들은 사회생활을 하니 무감각할 수밖에 하지만 여자들은 다르다. 결혼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누구 씨 하고 불러주면 어떨까?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뒤에서 살며시 안아주며 누구 씨 사랑해한다면 얼마나 행복해할까.

무디고 무딘 남자들 오늘만이라도 내 아내의 이름을 불러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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