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人(기인)

그 사람에게 부치다.

by 한천군작가

달빛이 강물을 만지는 것이 너무 고와

건너 대밭을 엇갈리게 그림자 만들고

고개 숙임 없는 고고함이라도 배우라는 듯

내 곁에 매화나무를 건드린다

늘어진 가지 따라 달빛도 늘어져 있으니

그림을 그린 듯 글을 쓴 듯하여

고이 모셔다 방으로 가려해도

짙은 그리움처럼 그 자리를 지키려 드니

잊힌 향기만 남은 그림자였다.

지키지 못한 시간의 그림자만이

옛 것이 되어 빛바래가지만

잠깐의 잊히움에도 나는 놀라버렸다.


修堂(수당) 李南珪(이남규)의 修堂遺集(수당유집)을 보다가.


누군가에게 남겨두고 싶은 글이 많으나 그것을 전하지 못하니 오늘은 슬프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역시 슬프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마음을 옮겨두지 못하면 나에게 화가 나니 쓸 뿐이다.

가을이면 더욱 많은 글을 쓰게 되는데 그 모두가 한결 같이 그리움이라니 하며 다른 구도로 그림을 그리듯이 다른 글을 써 봐야지 합니다.

그 사람이란 과연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무디어진 것일까 하는 마음에 허허로움 감추지 못하고 모두 잠든 시간에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으니 그도 그리움을 감추기 위함이 아닐까...

누구나 그리움은 가지고 산다.

누구나 그리움 때문에 산다.

만약 우리에게 그리움 한 줌 없다면 공허함에 묶여 살지 않을까?

해서 나는 그리워할 것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리워할 것이다.

寄人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이가 아닐까.

이곳에서 만나는 모든 執友(집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쉬면 그리워 미칠 것 같은 내 안의 갈증을 아는 것은 내 글벗이기에 오늘도 님들을 그리워하며 글을 쓴다.


修堂(수당) 李南珪(이남규)

1855.11.3~1907.9.26(음력 8.19)] 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尾洞)에서 부친 호직(浩稙)과 모친 청송(靑松) 심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字)는 원팔(元八), 호는 수당(修堂)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선생의 집안은 고려시대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조선시대 이산해(李山海)와 이경전(李慶全) 등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유가(儒家)의 명문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학문의 전통이 매우 깊었다. 그리하여 선생 또한 후손들에게 “문장에 대한 연원을 다른 곳에서 구할 것 없이 가학(家學)에서 구하여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가전(家傳)의 학문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 가학을 익히면서 선생은 7세 때부터 당시 기호 유림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성재의 학문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안정복(安鼎福)의 학풍을 잇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의 학문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도, 공리공담에 빠진 공허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이 배어있는 실학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의 투철한 현실인식과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 민족의식은 바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고, 이후 외세 및 일제의 침략을 경험하면서 더욱 심화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직후 외직인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가기까지, 서학교수(西學敎授),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간(司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부응교(副應敎)․응교(應敎),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우승지(右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형조참의(刑曹參議) 등 청환(淸宦)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유가사상을 구현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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