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내리는 가을에게
눈에 담기도 전에
가슴이 알아버렸는지
어리석게도
두 눈으로 모두 담지 못하는 것을
어찌 가슴으로 담으려 하였을까
응고되지 않은 기억이
細雨(세우)되어 흐르고
그 아래에서 하나씩 죽어간다.
손톱달 마저도 숨어버려
허하기만 한 강물
그 곁은 걷는 기억 조각들이
흐르다 지쳐 숨 죽여버렸다.
바라보다 멈춘 내가
기억 하나를 숨겨두고 있다.
細雨(세우).... 가랑비라는 뜻
저녁 비가 내리고 창밖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 속으로 큰 우산을 하나 펼쳐주고 싶다.
생각지도 않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모두 갈팡질팡한다.
잠깐이라도 내려주니 좋다.
그렇게 기다리던 여름 소낙비는 아닐지라도 이 계절을 적시기엔 충분하니 좋다.
멀리 보이는 신호등 불빛이 비에 젖어 흐릿하고 간간히 우산이 보이는 것이 많이 오나 하며 창문을 열었는데 뻗은 내 손에 사뿐히 비가 내려앉았다. 이 정도면 모자 쓰고 나가볼까 하는 맘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은 이렇게 손위로 앉아 노는 가을 객과 함께하고 싶어 다 가길 꺼려한다.
여름을 다 보내고
차갑게
천천히
오시는군요
사람과 삶에 대해
대책 없이 뜨거운 마음
조금씩 식히라고 하셨지요?
이제는
눈을 맑게 뜨고
서늘해질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시는군요
당신이 오늘은
저의 반가운
첫 손님이시군요
이해인 수녀님의 가을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