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시간에게 미안해...
먼저 간 시간이 이 길에 나와있고
풍경은 그때 그대로인데
저기 저 돌담에 숨겨 둔
그 시절 그 마음을 만나러 간다.
혹시라도 내 마음이 변하진 않았을까
혹시라도 그 시절이 변하지 않았을까
멈춰 선 추억이 이 길에 나왔고
담벼락을 미끄러지던 내 손은
그때와 같이 미끄러지듯 스치는데
그때 두고 온 마음에게 미안하다.
혹시라도 잊힌 건 아닐까
혹시라도 잊은 건 아닐까
천천히 떨어지는 낙엽의 엷은 그늘이
그날의 가을비를 기억할까
눈물처럼 흩날리던 가을비 사이로
숨겨버린 많은 편지에 미안하다.
정동극장 지나는 두고 온 시간에게 미안해
이제야 찾아온 내가 너무 미안해
2016.10.22 정동길 시립미술관에서.
정동길 나들이는 늘 한결같다. 교보에서 책을 몇 권 사고부터 시작이 된다. 구세군 중앙회관을 지나면서 잠시 쉬어가고 눈 앞에 이어진 가느다란 그 길을 먼저 눈으로 음미를 하고 불어오는 바람으로 가을이 코끝에 살짝 앉는 것을 느낄 때 즈음 다시 걷기를 시작한다. 조금만 더 늦게 올걸. 아니 11월에 다시 오면 되는데 하며 설익은 가을을 지나친다.
나에게 정동길은 스물셋의 그해 가을 모든 것을 두고 온 곳이기도 하다.
군복을 입은 그날은 비를 피하지 않고 걸었고 덕수궁 돌담을 아이처럼 손 맞춤을 하며 미끄러지듯 스치는 손끝의 감촉에 기억 하나를 문지르고 떨어지는 낙엽 속에 툭 하고 기억하나 차 버리고 그러다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그만 담벼락을 스치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버렸던 곳이다.
왜 그날 이곳을 걸었을까? 아마도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이별을 한다는 말에 끌린 것일까? 그럴 것이다.
이별을 하고 그 이별이 실감이라도 나길 바라는 마음에 그 길에서 마지막 사진 하나를 두고 왔으니 그 마음이었을 것이다. 뒤에 알은 이야기로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길을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은 과거 가정법원이 그곳에 있어서 이혼을 하는 부부들이 지나다니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쓴 미소를 지은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언젠가 함께 와서 걸어야지 하며 휴가 때면 꼭 한번 걸어보고 집으로 내려갔었다. 제대하는 그날 꼭 와야지 하는 맘으로 하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소망이 되어 버렸기에 서둘러 그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그대로다. 저길의 가로수도 그대로다. 아니 약간 살이 찐 듯한 몸집일 뿐 그 자리 그대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저기 정동극장 앞 가로수에 기대어 앉아 사진을 뚫어져라 보고 가끔 지나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려고 아니 비를 피하기 위해 정동극장 안으로 들어가 한 동안 지나는 사람만 보았었다.
지금 그 앞을 태연하게 걸어가는 나를 발견한 그 시간 속 나는 뭐라고 말을 할까?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대 내 곁에 있어요 떠나가지 말아요
나는 아직 그댈 사랑해요
하필이면 이 노래가 그날 그 자리에서 마음을 건드린 것인지...
그런데 오늘 거짓말처럼 이 노래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마치 환청처럼...
커피 향이 코 끝에 앉았다.
커피축제가 열리고 있다. 고소한 향이 잠시 걸음을 멈추게 만들고 홀린 듯 더치커피를 한병 사서 손에 들었다.
언제 집에 갈지도 모르는데 하며 뒤 돌아보다 그만 가방에 넣어버렸다.
커피보다는 체리 펀치가 좋아졌었고 그러다 보리차처럼 옅은 커피를 좋아하는 지금 진한 더치커피는 지난 시간을 한잔 가득 담아 마실 수 있겠구나 한다. 오늘 밤 서울의 야경을 한 모금하고 영화 소중한 날의 꿈을 떠 올리겠지.
저기 저 모퉁이를 돌면 대한문이 나오겠지. 그럼 내 지난 시간에게 작별을 해야겠지 하며 한걸음 한걸음을 더욱 천천히 마신다. 미안한 내 지난 시간 때문에...
두고 온 시간에게 미안해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 무엇을 선택해야 할 순간
미래에 대해 스스로 고민했던 어린 네가
중요한 이야기를 해 줄 거야.
지금의 답답함이 어른이 되어 지친 너의 꿈을 일으켜 세울 거야.
영화 소중한 날의 꿈 중에서 삼촌의 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