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최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으며,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시절이었고, 불신의 시절이었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으며,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으며,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중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소재로 한 최초의 다큐멘터리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인간적인 면을, 그리고 그의 뜻을 따라 걷는 것 같은 영화다.
우리의 기억이 하나의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 속 아니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마치 찰스 디킨스의 소설 속 변호사 시드니 카튼을 닮았다. 대니를 대신 해 죽었던 카튼처럼, 우린 그를 잃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어떤 모습인가?
여러 가지 물음표를 던져주는 이영화,,,
"이런 대통령이 또 나올까요?"
"나와야지"
이 대사가 먹먹함을 준다.
왜 이 대사가 가슴 아렸을까? 왜 우리에게 묻는 것처럼 들리는지...
나지막하게 극장 안을 암전으로 이끄는 그의 목소리에 영화는 비단 그의 업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현대를 살아가는데 무엇이 중요하고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노무현의 업적을 조명하는 영화가 아니라, 성별과 나이, 지역 등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한 사람에 대한 감정과 기억을 공유하고 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예견된 울림이 아니라 스스로 그 울림을 찾아갈 수 있게 인도하는 그런...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노무현의 진심과 그를 향한 대중들의 기억을 돌아보는 계기가 아닐까.
영화는 영남과 호남에 위치한 두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 속 파리와 런던을 대비시킨 것처럼 - 어쩌면 김원명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지역주의 해소와 권위주의 타파에 온 열정을 쏟았던 노무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가운데 김희로, 백무현 등 노무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역시 추억할 수 있다.
노무현의 평범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곁에서 내게 전해주는 것 같이 따뜻하면서도 슬프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는 작금의 시대에 그라는 아니 노무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영향력과 그만의 특별함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서는 제16대 총선에 출마한 부산 북강서을 지역을 배경으로 생생한 선거 유세 현장과 감동적인 연설 장면 등 ‘인간 노무현’의 생전 진솔하면서도 소박한, 동시에 확고한 신념에 찬 모습이 담긴 인상적인 장면들이 함께 교차되는 가운데 노무현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로서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메시지로 깊은 울림을 전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대담자들의 포장마차 씬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나에게도 소주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그를 추억하고 그가 남긴 그의 정신은 무엇이며 왜 우리가 그를 잊지 못하는지 등의 무수히 많은 질문과 이야기들이 어쩌면 함께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만들어서가 아닐까. 조용한 포장마차에서 저들과 함께이고 싶다.
가장 인간적인 그의 모습이 그리운 가을이다.
봉화마을에도 가을은 익어갈 것이다. 그리고 어수선한 현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작가 김원명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현상에 고민하던 중,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동지인 노무현과의 만남을 떠올린다. 어느덧 그가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지 일곱 번째 오월을 맞아 원명은 무현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데… 영화는 영남과 호남에 위치한 두 도시를 배경으로 지역주의 해소와 권위주의 타파에 온 열정을 쏟았던 노무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통해 그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적당히 대충하지 말라.
열 가지를 해야 한다면 스무 가지를 하라
-데니스 웨이틀리
그는 그런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영화를 보며 간간히 눈시울을 적시기도 그리고 숨소리조차도 방해가 되는 듯 한 느낌 속에서 나는 데니스 웨이 틀 리의 말이 떠 올랐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시드니 카턴에게 유머 감각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국민 전체가 혁명이라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 휩싸여 있는데 유머가 생길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카턴은 그 시대가 낳은 특이한 성격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도 그랬다. 시대가 그를, 그의 유머를 그림자 뒤에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아프도록...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 그는 가장 유머러스하며 가장 서민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오므려 포도주를 떠서 홀짝거렸고, 어떤 사람은 술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전에 등 뒤에서 들려다보고 있는 여자에게 한 모금 맛보게 해주었다. 깨진 사금파리로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떠마시는가 하면, 심지어 머릿수건을 풀어 포도주에 담갔다 아기 입안에 짜 넣어주는 아기 엄마도 있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중에서
파리의 길거리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소설 속의 이 부분이 마치 현시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옴을 느낀다. 포도주를 실어 나르던 수레에서 통이 하나 바닥으로 굴러 깨지고 술이 길바닥에 쏟아져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여서 바닥의 포도주를 거둬 마시는 이 장면이 왜 이 영화를 보고 그리고 100만 촛불시위를 보며 나의 뇌리를 스친 것인지 모를 일이다.
늘 뛰었다.
그리고 너무도 서민적이었던 그가 부르는 부산갈매기가 그리워진다.
비록 "안 되겠다"라는 투박한 경상도식 발음을 뱉으면서도 끝까지 불러주었던 그의 못하는 그 노래가 너무도 그리운 계절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라는 그의 말이 가슴을 두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닐까.
100만이 모여 우리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국가가 가지는 구체적 구상이 무너져 버린 지금 관화문에 모인 100만 명의 군중은 어쩌면 이응노 화백의 군상이 보여주는 그 시대적 배경과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길을 모르면 물으면 그만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
세상에 완벽한 지도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남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늘 잊지 않는 마음이다.
한 비 야
완벽한 지도는 없을지라도 완벽에 가까운 길 안내자의 지혜와 경험은 어쩌면 지도보다도 더 완벽한 것이 아닐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