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화 닮은 가을
햇살에 붉은 잎이 눈부시고
한들거리며 흔들거리기도 하는 것이
바람만의 장난일까
갈해 넘어가는 곳까지
따라가버린 낙엽들이
노을이 되어 화선지 가득 번진다.
선을 그을까 고민하니
이미 담채가 되어 버린 하늘이
선 조차 허락하지 않고
점이라도 찍을까 하니
사스락거리는 댓잎의 울음까지
번지고 번져 가을이 가 버렸다.
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기만 하지는 않다. 그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이었다가도 변덕스럽게 그 색이 발해버려 흑백사진 같은 느낌으로 까칠한 질감을 주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기다란 화선지를 펼치고 좌 우로 분진을 놓아 평평하게 잡아주어 농담을 조절하며 그리는 묵화가 가을 하늘이 아닐까.
가을 하늘은 그 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잔가지들이 있어 그 경계를 확실히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가을은 이래서 좋은가 보다.
창을 열면 노란 은행나무잎이 지금처럼 바람을 타고 놀고, 조금만 걸으면 붉은빛 단풍들이 곳곳에서 환하게 웃으며 재잘거리고 있고, 그 위로 하늘은 물든 산을 밟고도 모자라 까치발로 높아만 가니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서리가 내린다고 그 붉음이 가실까마는 그래도 그 색이 퇴색되어 버리니 아쉬움 깊어가는 것은 당연함이 아닐까.
가을은 또 그렇게 저기 서쪽 하늘의 번지듯 그려진 노을따라 산을 넘어가고 있다.
秋雲漠漠四山空 (추운막막사산고)
落葉無聲滿地紅(낙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입마계교문귀로)
不知身在畵圖中(부지신재화도중)
가을 구름 아득하고 산은 텅 비었는데
낙엽은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는구나
개천 위 다리에 말 세우고 돌아갈 길 묻는데
이 내 몸이 그림 속에 든 줄을 몰랐었네.
정도전(鄭道傳)의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림 속에 들었다고 노래를 하였을까.
더 추워지기 전에 무학산을 올라야겠다. 곁에 있는 산이니 가소롭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 역시 가을 그림 속에 들고 싶기 때문이다.
더 물들어 떨어지기 전에 그곳엘 가야겠다. 떨어지면 떨어져 붉은 땅을 보고 걸음 그만이니 하다가는 겨울이 옷자락을 잡을 것이 분명하니 나가봐야겠다는 맘이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