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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abba Oct 09. 2019

취향살이의 역사

내가 좋아한 편집숍의 변천사


1.

때는 2000년 대 초반.

촌구석(..)에서 사는 물건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한 시간 버스 타고 대도시로 나가 구제나 등짝 스매쉬를 담당하던 힙합바지를 사러 나가고는 했다.


그러다 인류의 생활을 바꿔놓은 "인터넷 쇼핑"이란 것이 등장했고 친오빠와 나는 용돈을 그러모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인터넷이란 신에게 헌금하듯 내놓았다. 물론 우리에겐 보이런던이나 컨버스 등등 당대 힙함을 담당하던 아이템을 하사하였으니 굉장히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아 문제집 산다 하고선 CD도 엄청 샀다. 배송은 학교로 받았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새로운 신이 있었으니 이름하야 '텐바이텐'. 그곳엔 옷뿐만 아니라 각종 신박템이 있었다

 이 세상 쓸데없는 물건들만 모아놓고 팔았는데 그게 왜 나에겐 그리 필요해 보였을까.


텐텐님과 함께 부흥했던 사이트로는 바보사랑이나 1300K도 있었는데 바보사랑은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들었고 (!) 1300K의 물건보다는 텐텐의 물건이 좀 더 다양하고 좋아 보였다. 아 그냥 이유불문 무조건 텐텐이었다.


집에서 독립했던 스무 살 때부터는 망아지 고삐 풀리듯 본격 쇼핑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뭐라 할 자 아무도 없나니 눈에 보이는 족족 옷과 각종 예쁜 쓰레기들을 사기 시작했다. 당시 용돈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돈만 빼놓고 나머지 돈은 다 텐텐에게 바쳤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때 사서 아직도 갖고 있는 물건들도 있으니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앨리스 인 원더랜드 팝업북이라던가 이런 것들..)


2.

그렇게 신나게 텐텐에서 쇼핑하며 용돈탕진잼을 맛보던 내가 홍대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되려 오프라인에 맛 들렸다. 집 앞만 나서면 카페에 옷가게에 온갖 희한한 물건을 파는 요상한 동네였으니 굳이 배송비 내며 배송 기다리며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특정 가게가 단골이라기보다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데로 들러서 구경하곤 했는데 그래도 자주 갔던 곳이라면 마켓엠(홍대점이 먼저였다)이나 홍대 정문 앞에 자리 잡았던 네스카페 지하 1층 아이 띵 소(텐바이텐의 편집 브랜드)였다.


특히 아이띵소는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할 일 없을 때에도 들르던 최애 샵이었다. 책도 음반도 꽤나 잘 큐레이션 되어있어서 괜히 살 것 없나 들렀다 책 하나 음반 하나씩 꼭 사들고 나왔었다. 그리고 각종 쓸데없이 예쁜 것들은 다 모아놔서 들어가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대고 나오면 꼭 샤워한 것처럼 마음이 개운해졌다. 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어 라는 느낌일까.


당시 마켓엠이나 아이띵소만큼 또 자주 갔던 곳은 홍대 AA카페. 그리고 조금 뒤에 생긴 에이랜드였다.


AA카페는 그리 자주 가진 않았는데 (거주지에서 좀 멀었다) 당시 홍대 힙스터들은 그곳에 다 몰릴 정도로 굉장히 핫했다.


에이랜드는 명동에서 처음 봤을 때 제대로 된 중고 의류 존이 구획되어 있어 감동스러웠다. 잠시 잊고 지냈던 내 안의 빈티지 갬성이 다시 피어오르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 구역은 사라졌다.)


3.

홍대를 필두로 여기저기 프리마켓(혹은 플리마켓)이 성행하던 때인데 그래서 홍대 놀이터에 프리마켓이 열리는 날이면 꼭 들르곤 했다. 굳이 뭘 사지 않아도 작가들의 다양한 제품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프리마켓의 장소는 어느덧 홍대에서 강남으로 옮기게 됐는데, 바로 쿤스트할레다

쿤스트할레는 건물 디자인만으로도 엄청 이슈 되었던 곳이고 각종 힙한 행사는 여기서 다 열렸다. 지금의 성수동 느낌이랄까.


그리고 월 1회 토요일에는 프리마켓이 열렸는데 이게 꽤나 괜찮았다. 해외에서 직접 가져온 액세서리나 잡화부터 의류 음반 책 등등 아주 다양한 물건들이 펼쳐져 있었고 나는 돈과 매의 눈만 가져가면 됐다. 물건을 사며 판매자와 이야기 나누는 것도 즐거웠고 그곳에서 팔던 소시지 핫도그와 맥주도 맛있었다.


그렇게 한 5회 정도 연속으로 플리마켓에 갔었는데 점점 마켓이 의류가 많아지고 카테고리가 줄어들어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4.

홍대에 살았지만 회사는 가로수길이라 이제 나의 취향은 가로수길 갬성으로 조금씩 옮겨가기 시작했다. 당시 가로수길에는 네스카페와 블룸앤구떼가 있던 시절이었다. 가로수길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네스카페와 블룸앤구떼가 사라지고 대형 자본이 들어서면서도 작은 부띠끄 샵들은 속속들이 남아있기도 생기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가로수길에 있는 편집숍에는 자주 가진 않았다. 대신 시장조사 차원에서 10꼬르소꼬모나 한남동의 꼼데가르송을 두어 번 구경 가는 정도였는데 내가 지금껏 갔던 곳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이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5.

가로수길에 거의 살다시피 하며 잡지보다도 내가 먼저 맛집과 핫플레이스를 드나들던 때에 드디어 맘에 드는 샵을 찾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챕터원과 브라운브레스.


두 브랜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읭? 할지도 모르겠다. 쉽게 말하자면 챕터원은 한남동이나 도산공원이라면 브라운브레스는 홍대니깐, 두 공간 사이의 갭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게 나의 취향이었다. 챕터원처럼 어디에서도 쉬이 볼 수 없는 아이템을 좋아했고 브라운브레스처럼 홍대갬성도 여전히 좋았다.


신기하게도 두 매장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편히 구경하러 놀러 오세요'라고 말하는 매장 스텝들의 친근함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주우 편하게 할 일 없을 때마다 혹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자주 드나들락 했는데 이게 그때의 취미이자 낙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잠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것. 덕분에 나는 쉴 틈 없이 바쁜 회사 생활 속에서 숨은 트고 살았다.


그리도 가로수길에서 마지막으로 마음에 두었던 편집숍이 있었는데 그곳은 데일리라이크였다.


 

6.

혼하고 애도 낳고 자연스레 독특한 편집숍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대신 근거리에 있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예쁜 쓰레기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이마트의 자주가 내게는 자주 가는 편집숍이 되었다.


뭐 살 것 없어도 그냥 구경하고, 이게 필요할 것 같아라며 신랑에게 눈빛을 보내보기도 하고.... (신랑의 제재에 겨우 정신 차릴 수 있었다)


지금은 편집숍들이 대형 쇼핑몰에도 많이 입점되어 그 아쉬움을 해소하기도 한다. 송도현대아울렛에 가면 데일리라이크가 있고 스퀘어원에 가면 무인양품도 있다.(지금은 당분간 끊었다)


그리도 헤이리에 가서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근처 카페 숍에서 빈티지스러운 인테리어 소품이나 옷과 액세서리를 구경한다.


라이프스타일 숍이라고도 하는 편집숍은 어느새 이렇게 우리의 생활권으로 쑤욱 들어와 진짜 '라이프'스타일 숍이 되었다.


7.

그래서 나의 취향은 어떻게 편집됐을까 돌이켜보면

여전히 나는 쓸모 있는 것들보단 쓸모없는 것에 이끌린다. 때에 따라서는 쓸모없는 걸 있게끔 합리화 하기도 하지만.


특히 나는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 매장을 선호하는데,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며 특유의 향을 감지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좋아하는 듯하다. 제품을 살 때 정성스레 포장해주는 것까지 보게 되면 음 그래, 역시 잘 샀어하며 합리대마왕이 된다.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여전히 오감으로 천천히 음미하고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편집숍이라 그런 걸까. 어쩜 편집숍은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놀이공원일 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과하더라도 일상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씬을 연출해 주는 공간. 일상과는 다른 삶,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삶. 나는 그 삶을 사러 오늘도, 편집숍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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