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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생이 Sep 17. 2023

04. 한국인이 마지막 한 조각을 남기는 이유(2)

한국에는 관계주의가 있다.

04. 한국인이 마지막 한 조각을 남기는 이유(1)

현대 한국인의 특별한 관계주의

해외의 유명한 팝가수들이 한국에서 공연을 하면 가장 놀라는 부분이 한국 팬들의 ‘떼창’이다.

그래서 한국인을 흥의 민족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가 흥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이의 락 페스티벌 경험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번엔 잠시 인천 송도의 락 페스티벌 현장으로 떠나보자.     

2022 인천 펜타포트 락페스티벌 현장





락 페스티벌은 너른 잔디밭에서 열리는

릴레이 락 공연 잔치다.

락 공연 시간표가 짜여있고, 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시간에 맞춰 공연장 앞으로 가서 놀면 된다. 쉬고 싶은 사람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간식을 먹으며 누워 자기도 한다.

놀 때는 정말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논다. 옹기종기 출퇴근길 지하철보다 더 가깝게 붙어서,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을 즐긴다.

지하철과는 달리, 몸이 부딪혀도 서로를 도끼눈으로 쳐다보지 않는다. 어떤 추악한 몸짓으로 리듬을 타도 전부 용서된다. 모두 각자의 음악을 즐기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이중에서도 단연 장관을 이루는 것은, 방방 거리며 원을 만들어 뛰다가 투우처럼 달려와 서로의 몸을 부딪히는 ‘슬램’이다.

‘슬램’은 갑자기 시작된다.

강강술래라도 할 듯이 옆 사람과 손을 잡고 원을 만든다. 만원 지하철 같던 잔디밭에 텅 빈 공간이 생긴다.

스포츠 경기가 끝났을 때처럼 하이파이브를 하며 달려가기도 하는데, 이게 핵심은 아니다.

이 원 대형의 정수는 음악의 하이라이트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


♫ “나는 낭~만 고~양이~”


원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원의 중심으로 뛰어든다. 내가 상대방에게 몸통 박치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에게 박치기를 당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다.

몸은 땀과 비가 섞여 축축하고, 부딪힐 땐 미끄덩하며, 발이 밟히는 것은 예삿일이다. 신발은 잃어버리지 않으면 다행이고, 몸 곳곳에는 멍이 들기도 한다.

이 모든 사실에도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부대끼며 음악을 만끽한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각자가 들고 있던 물건들을 잃기도 하는데, 이때 한국인의 관계주의, 그 기지가 발휘된다.


“핸 드 폰! 핸 드 폰! 핸 드 폰!”
누군가 외친다.

외침 소리는 옆사람의 옆사람으로, 그 옆사람의 뒷사람으로 또 앞사람으로 퍼진다. 돌이 던져진 호수의 물결처럼 번진다.

그럼 결국 핸드폰의 주인이 발견된다. 주인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수를 치며 생일이라도 된 양 ‘호우~~‘ 환호성을 치며 축하해 준다. 과연 다른 어떤 나라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전에 본 적도 없는 남의 폰을 주워 들어, 주인을 찾기 위해 목청껏 소리치고, 폰을 찾은 것을 내 일 마냥 기쁘게 축하해주는 이런 나라는 지구촌 마을에서 한국 마을이 유일할 것 같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우리 민족이 흥의 민족일 수 있는 이유, 함께 노는 데 진심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전혀 관계없는 남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연자, 너도 '우리' 중 하나야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무대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눈을 감고 분위기에 취하거나, 옆 사람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 아예 무대를 등지고 공연을 즐기기도 한다.

아티스트를 '신'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같이 노는 사람'이라는 동등한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무대 위에 서있는 당신도
우리와 같이 노는 사람이야.
다만 지금 당신이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쥐고 있을 뿐이야.

우리 중 당신이 음악을 제일 잘하니까
무대에서 공연을 해줘.
무슨 노래가 나오든 우리도 따라 부르며 놀게.

신나는 노랠 부른다면
우린 슬램을 하며 놀 거고,
잔잔한 노랠 부른다면
휴대폰 후레시를 흔들며 별처럼 비출 거야.

어느새 밤이 되어
우주처럼 까맣고 빛나는 우리를 봐.
너의 공연은 너무 멋지고,
우리도 이만큼 즐기고 있어.
 
다음엔 뭘 부를 거야?
앵콜 해줘. 크게 소리 지를게.

공연의 주체와 객체라는 구분을 허물고, 무대 위 공연자도 남 같지 않게 여겨버리는 한국인의 배포란!


특별함의 비결

사실 놀라운 결속은 역사 속에도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집성촌이나 약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 30년 전 금 모으기 운동을 떠올려 보라. 전통처럼 이어져오던 공동체주의는 많은 것들을 가능케해주었다.


1: 대전의 한 집성촌(출처. 한겨레) / 2: 국채보상운동을 나타낸 그림(출처. 영남일보) / 3: 금모으기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출처. 중앙일보)


공동체주의와 관계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예컨대 집성촌은 같은 성 씨끼리 모여 ‘우리’를 만들고, 그 관계는 대대손손 이어졌다.

재산 상속도 성을 따라 이어졌으며, 고인 물은 썩어 각종 병폐가 출현하였다.

이렇듯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는 배제와 폐쇄성에 기반하여 결속력은 높지만 결국에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반해 락페 현장에서 확인한 바 있는 현대의 ‘관계주의’는 언제나 열려있다. 누구나 우리를 만들 수 있으며 누구나 우리에서 나갈 수 있다.

우리끼리, 아는 사람끼리, 무리를 만들어 기득권을 자처하지 않는다. ‘우리’가 되는 장벽이 낮고, 연결도 느슨한 것이다.

흙으로 도자기 빚듯 각양각색의 ‘우리’를 만들어내는 비결은 관계주의의 ‘유연함’에 있다. 유연하면서도 개방적인 관계로 권위를 갖지 않는 것. 그것이 현대 한국인만이 가진 특별함의 비결이다.





한국의 교육은 특별한가?

‘우리’라는 정체성과 ‘나’라는 개성, 둘 다를 가진 한국인.

여기서도 ‘우리’가 될 수 있고, 저기서도 또 다른 ‘우리’가 될 수 있는 현대의 한국인.

다른 어디에도 없는 특별함을 가진 우리에게,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교육을 그대로 갖다 쓴다면 어떨까?

아마 우리에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한국에는 한국만의 관계주의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만의 교육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출처. 제주 MBC NEWS

그렇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에게, 정작 행해지고 있는 교육은 다른 나라에서 잘 나간다는 교육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중의 한 예가 IB교육(국제 바칼로레아)이다. 그게 뭐냐고? 뭔지 몰라도 상관없다. 교육적 대화는 당신이 모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면 된다. 사실 그게 내가 이 글을 쓰는 단 한가지 이유다.


일타 강사 이름은 알고

교육과정 이름은 모르는 현실

학생과 학부모는 잘 나가는 일타 강사나 학원 이름은 줄줄이 꿰면서도

현행 교육과정의 이름이나 특징에는 관심이 없다.

많은 어른들은 졸업 후, 교육과는 담을 쌓고 현생에 치여 지낸다.


우리는 분명 어떤 교육을 받아왔고 그때의 교육에 영향을 받았다.

나는 '수준별 수업'을 강조했던 7차 교육과정과 2007 개정 교육과정을 배웠고,

어쩌면 그때부터 수학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당신도 나도, 교육과 함께 정체성을 형성했고, 한국 교육으로 인해 한국인이 되었다.


이제 나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SW, AI 관련 수업을 위해 역량을 개발한다.

당신은 어떤 움직임을 하고 있는가? 어떤 것이든 우리의 영향은 다시금 앞으로의 교육에 반영될 것이다.

당신이 곧 교육의 산물이며 교육 자체다. 한국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또 주며 바뀌어가는 한국 교육은, 교육계의 몫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아는가? 우리나라 교육과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출발한 것인지, 혹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어디에 기원을 두고 어떤 모델을 모방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것인지를.

지금이 7차 교육과정인지, 2015 교육과정인지, 아니면 또 다른 교육과정이 있는지, 가장 최근의 교육과정은 뭐라고 하는지는?


(아래 사진들만 봐도 1타 강사들이 2022 개정 교육과정보다 훨씬 익숙할 것이다.)

1: 미스터트롯에도 출연했던 수학 1타 강사 정승제 (출처. 조선일보/이신영 영상 미디어 기자) 2: 10여 년간 사탐 1타 강사인 이지영. / (출처. 조선일보/유튜브 캡처)
2022 개정 교육과정의 핵심 내용


교육적 대화를 ‘하게 될’ 때까지

관심 없는 무엇인가에 대해 찾아보고, 알아보려면 일부러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관심을 갖게 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저절로 찾게 되고, 알게 되는 노력을 하게 된다.


나는 여러분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연스레 교육을 찾게 되고, 알고 싶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

일부러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노력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삶은 많은 색을 품고 있는 빛과 같다.

대화라는 프리즘을 통과시키면 삶은 역사, 철학, 경제, 사회, 정치 등의 무지개 빛 스펙트럼으로 나타난다.

교육은 연속된 스펙트럼 속 한 지점이다. 세상의 다양한 분야와도 이어져있으며 당연히 삶 전체와도 연결되어있다.

새롭게 연구해야 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분야. 그리고 교육이라는 한 지점.

우리가 할 일은 밥상머리에서, 카페에서, 사무실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대화를 ‘하게 될’ 때,

삶의 스펙트럼 속에서 교육이라는 색깔을 들춰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살다 보면 당연히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게 바로 내가 말하는 ‘교육적’ 대화다. 별 거 없다.

MBTI 핫 하던데,
요즘 애들도 그런 거 학교에서 하나?

우리는 어렸을 때 그런 거 안 배우고 뭐 배웠지?

지금은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우지?

그거 어디서 온 거지? 잘 가르치고 있나?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대체 누가 정한 거고
왜 꼭 이걸 배우도록 했지?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필연적으로 우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며, 어느 지점이든지 인생의 이야기는 교육과 맞닿은 점이 있다. 그 지점을 조금 더 주목해보자. 그럼 자연스럽게 교육적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신이 대화를 시작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막막한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도 나는 당신이 대화를 시작하도록 도울 것이다. 밥상을 차릴 것이다. 반찬을 바꾸어가며 요리를 낼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당신과 나누는 이야기야말로 내가 기다리는 가장 맛있는 반찬이며,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교육 밥상은 완성된다.


교육적 대화를 시작하는 당신에게 오늘 이 글이

밥상머리의 시작을 알리는 수저 한 쌍이 되면 좋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인의 특성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1부 글에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벤트 중>> )

한국의 관계주의, 이를 잘 살릴 수 있는 교육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경험한 공교육 수업 중에 있나요?

한국 입시가 우리의 성향에 맞다고 생각하나요? 무엇이 바뀌었으면 좋겠나요?

외국에서 인정받은 좋은 교육이라면 그대로 가져와도 될까요?

인공지능 교육, SW교육 등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새로운 교육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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