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도망가자 12

추억이 없는 사랑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by 목문수



화집의 접힌 귀퉁이를 펼치니 "어둠과 그림자"라는 글자가 작게 메모되어 있었다. 소년은 그 페이지의 그림을 잘 보기 위해 가로로 돌렸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붉은 머리털과 긴 수염을 한 남자. 병사 하나는 바닥에서 그를 결박하기 위해 남자와 함께 드러누워 있었고. 또 다른 병사는 이제 막 그의 오른쪽 눈에 칼을 찔러 넣고 있었다. 그림의 왼편으로 또 다른 병사가 어둠 속에서 결박당한 남자를 향해 큰 창을 내리 찌를 듯이 위협한다. 빛이 쏟아지는 동굴의 바깥쪽에서 한 여인이 남자의 털 뭉치를 잘라 들고 도망가면서 그를 돌아본다.

소년은 이 그림이 <삼손과 델릴라>라의 한 장면을 묘사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그림이 전하는 참혹한 순간의 긴박함 만큼은 알 수 있었다. 넘어지면서 하늘로 올라간 남자의 발과 온몸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환하게 빛을 받고 있었고.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은 실루엣만을 남겨둔 채 동굴의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그때, 소년이 기대서 있던 벽의 반대편 오피스텔의 철문이 빼꼼 열렸다. 문을 연 남자는 소년을 확인하고 급하게 다시 문을 쾅 닫았다. 안쪽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새 나왔다.


"그 새끼 아직도 안 가고 문 앞에 쳐 앉아 있어, 거지 같은 새끼, 존나 끈질기네. 어, 짭새같은 건 없고... 혼자."


소년은 화집을 가방에 챙겨 넣고 대신 수건으로 싼 작은 칼자루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피스텔의 철문이 다시 열렸다.


" 야. 너 하나 때매 짱깨 하나 못시켜먹고 지금 저 방에 몇 명이 벌서고 있었는지 알아? 재수없는 새끼!

너 여기 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오토바이 사고 하나 만드는 거 일도 아냐. 너 하나 병신만드는 거 일도 아니라고. 여깄어, 다 가져가 인마! 우리도 죽은 애 사진 가지고 장사하는 거 존나 재수 없어. 꺼져라, 병신 새끼..."


남자는 동그랗게 말려진 인화지 뭉치를 바닥에 던졌다. 소년은 그 사진 뭉치를 주워 가방에 넣었다.


닫히려던 문 안쪽에서... 다른 남자 하나가 목소리를 보탰다.


"소원이는 너 같은 얘 안 좋아했다고. 병신아. 그만 애틋해.... 어떤 앤 줄도 모르고. 니가 생각하는 그런 얘 아니야. 걸레같은 년 하나..."


소년은 그때, 주머니 칼을 꺼내 거의 닫히는 문쪽으로 달려갔다. 팔을 뻗으면 저 더러운 눈을 찔러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연습한 대로만 한다면 여덟 개의 눈알을 쑤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허공을 휘저은 소년의 칼은 몇 명의 장성한 남자들의 너무 쉽게 제압되었다.


복도식 오피스텔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소년의 몸은 여러 남자들의 발길질에 무너지고 부서졌다. 소란스러운 구타 소리에 놀란 복도 끝 오피스텔 거주자가 잠깐 문을 열었다가, 다시 급하게 닫았다.


실컷 분풀이를 한 남자들은 소년의 몸을 질질 끌어 오피스텔 유리문 밖에 던졌다. 반쯤 열린 소년의 가방에는 소녀의 사진 뭉치와, 램브란트의 화보집이 반쯤 삐져나와있었다.





* * * * *




남자는 소녀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소녀는 부끄러운지 손길을 조금 피했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소녀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소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 소녀의 동그란 눈이 감겼다. 남자는 소녀의 눈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소녀가 다시 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가 말했다.

"... 키스해도 돼? "

소녀는 눈을 감았고, 남자의 입술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차마 스칠 수 조차 없던 그녀의 작은 손을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잡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 작은 귀와 분홍색 볼을 아무렇지 않게 감싸 쥐었다. 웃을 때 약하게 들어가던 보조개와 작은 점이 남자의 큰 손 안에서 사라졌다. 남자의 몸이 다가갈 때, 어찌할 줄 모르던 소녀의 작은 손이 허공에서 그의 허리춤을 꽉 잡던 것을 소년은 기억했다. 소년은 소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열 발작 뒤에서, 소녀의 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 추억이 없는 사랑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소년은 지금 소녀가 그리웠다. 차마 다 감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와 긴 속눈썹이 사진처럼 너무 선명했다. 바닥에 던져진 작은 어깨에서 나온 하얀 팔이, 어디를 향하고 있던 건지 알 수 없던 그 작은 손가락들이 그리웠다. 심장의 피를 모두 뽑아도 좋으니 용기를 내서 그 남자의 어깨를 밀쳐내고 그녀를 안고 싶었다. 파도라면 다 부서져 물거품이 돼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마음껏 뛰어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전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시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조차 존재하지 않을텐데. 이젠 소녀조차 사라져 버린 사랑인데. 소년은 그리워 가슴을 쥐어뜯으며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죽었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그랬다면 세상은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파도는 여전히 시원했을 것이고. 아무도 밤 바닷가에서 목놓아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소녀의 아버지는 더 이상 잠못자고 서성이는 밤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기적인 소년의 부모는 마침내 서로를 죽이는 결박을 풀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년은 살아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여인과 아이의 그림. 소년은 그 페이지를 본 후에, 소녀의 미소 띤 얼굴 사진 한 장을 꺼내 스케치했다. 소년이 그린 그림 속의 소녀도. 알듯 말듯한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잠들어 있었다. 소년은 그 그림을 가슴 안쪽에 넣고, 파도가 치는 바다를 향해 휘청휘청 걸어 들어갔다.





그 밤.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소년이 타고 온 오토바이가 아무렇게나 눕혀져 있었고, 불에 태운 소녀의 사진들이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먹다만 소주 병과 램브란트 화집도 아무렇게나 펼쳐져서 바닷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X___ocs7Pl0

사랑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가벼운 사랑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 토니 모리슨

Love is or it ain't. Thin love ain't love at all. - Toni morrison, Be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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