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습한 만큼 다 안 나오겠죠, 시험장에선? "
한 아이가 스케치를 끝내고는 뒤에서 지켜보던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미술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탁자 위에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컵 라면 한 개, 구겨진 목장갑, 사과 한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예고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 중 학원에 따로 갈 형편이 안 되는 네 명의 소년이 각각 자신의 이젤에 앞에 앉아 걱정의 한마디를 늘어놓았다.
"시간 안에 완성만 제대로 해도 좋겠다"
"손이 곱등이 된대, 셤장에선. "
여자는 대답 대신, 첫 번째 질문을 던진 소년의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가 연필을 들고 체크했다.
"... 넌 특히 밑그림 단계에서 설계를 좀 꼼꼼하게 해야 돼. 수채화는 붓 들면 수정이 어려운 거 알지. 빛은 뭐다? 그림자로 표현된다. 여기 봐. 여기서 빛이 들어오니까 하일라이트는 여기. 가장 어두운 부분은? 그렇지. 양감을 주려면 반사되는 빛은 여기. 그림자는 여기. 이렇게 비닐봉지까지 덮여 있으면 더 어렵지? 비닐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부분은 컵라면의 기본 형태랑 다르니까 또 표시를 해줘야지, 그렇지. 그리고 목장갑의 질감, 사과의 질감 각각 다르지. 질감이 다른 표면은 빛을 산란하는 방향이나 두께도 달라. 다 체크해야 돼. "
앞자리에 앉아있던 소년 둘이 스케치를 마치고 수채화용 커다란 파란색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미술실을 나갔다. 그때 미술실 문 앞에 서 있던 상훈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젤을 펴고, 빈 스케치북 하나를 올린 채 뒤편 한쪽에 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는 자기 자리에서 잘 깎인 4B 연필 두 자루를 들고 상훈에게 다가갔다.
"... 선 연습부터 하는 거야. 자, 여기 연필. 이렇게 가볍게 잡고 팔은 움직이지 말고 손목의 스냅으로만 가볍게 긋는 거야. 이 정도 강도로... 좀 더 진하게. 가로로 그것만."
상훈은 조금 실망한 듯 한숨을 쉬고는 선긋기를 시작했다. 여자는 이미 지난 미술시간에 두껍고 뭉개지기 쉬운 콩테를 쓰는 소년의 능력을 확인한 바 있었다. 재료의 특성을 빨리 파악하고 힘 조절이 능숙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방안의 아이들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할 수는 없었다.
물통을 들고 들어오던 소년들이 미술실 안에 앉아있는 상훈을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에 대한 서로 간의 눈빛 질문이 오갈 때 여자는 고갯짓으로 착석을 지시했다. 고요한 미술실 안에는 아이들이 붓질 소리. 소년의 연필 소리만 가득했다.
여자의 마음이 아주 오랜만에 평온해졌다. 잠들지 못한 밤에 홀로 앉아 명상을 해보려고 아무리 집중해도 떠나지 않던 귓가의 이명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는 책상 한편에 올려두었던 독일 타쉬사에서 나온 화집 시리즈 중, 제일 위에 놓여있던 램브란트 화집을 꺼내 펼쳤다. 조금씩 시력을 잃어가고, 경제적 궁핍이 지속되면서 이전의 정교하고 세련된 그림과는 다른 화풍으로 그렸던 얼굴. 거친 붓 자국이 선명한 램브란트의 자화상이 알듯 말듯한 노인의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상훈이 서너 장의 선긋기 연습을 마치고 탁 연필을 내려놓았다. 뭔가 결심한 듯 일어나 여자를 향해 걸어왔다. 윤정아 선생의 눈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온 상훈은 그녀가 보고 있던 램브란트 화집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오며 말했다.
"... 이거, 좀 빌려도 되죠?"
미술실 안의 아이들은 곁눈질로 저돌적인 상훈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고. 여선생의 당황하는 모습도 똑똑히 확인했다. 그때, 스케치를 꼼꼼히 하지 않았다고 지적받았던 소년이 지금이 기회라는 듯 이렇게 외쳤다.
" 쌤... 햄버거 사주세요~ 저희도 사주세요. 햄버거! "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도 '햄버거'라고 소리쳤고. 상훈은 당황하는 여선생과 아이들을 노려보다 램브란트 화집을 들고 미술실을 나갔다. 복도를 지나던 아이들 몇몇이 햄버거 소리에 반갑다는 듯 창문에 매달려 "쌤~ 햄버거. 햄버거"를 따라 외쳤다.
* * * *
"... 현실성도 없고, 고집만 세고. 으이그 진짜 그 나이에 사춘기야 뭐야? 왜 엄마 아빠한테 얘길 안 해. 나중에 니네 엄마 아시면 나 어떡하라고. 자존심 상할까 봐 말 못 했는데. 아 몰라. 공인중개사 언니가 죽었다 깨놔도 못 산대. 그 예산으로는 지하밖에 안된대. 요새 집값이 그래, 미쳤어. 그리고 이제 한 겨울 올 텐데, 어떻게 사니? 그냥 좀 버텨. 아니, 너네 남편이 나가라는 것도 아니고. 멀쩡한 집 놔두고 왜 그러는 거야. 진짜.
... 아까 교감선생님 면담 잘했지. 안 맞아도 좀 맞춰드려. 뭐 교육자신데 너한테 나쁜 짓 하겠니? 집 나온다고 난리 치지 말고 현실적인 밥벌이부터 궁리해. 현대 자본주의를 사는 근로소득자가 그 정도 비위도 못 맞추면 어쩌니.
참... 너네 반 상훈이, 웬일로 미술반에 제 발로 찾아왔다면서? 걘 또 왜 그래. 무섭게... "
수학 선생은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서 두 발짝 떨어진 쓰레기 통으로 휙 던졌다.
- 계속
여기에.. - NY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