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훈이 앉아있던 석고실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얼굴을 알아본 그는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듯 입을 한번 삐죽 내밀고는, 굴러가는 의료용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간호사에게서 받은 의료 톱의 전원을 올리자 날이 윙-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돌기 시작했다. 큰 소리에 소년은 조금 움찔했다.
" ... 확 짤라버릴까? ㅋ 봐, 사람 피부에 닿으면 딱 멈추지? 못 자른다 이걸로는. 쫄낀... 이거두 쫄리는 새끼가 그렇게 노냐? 니 팔은 인피니티 건틀렛인 줄 아는 거 아니었어? 인마 사고 치고 다니는 거 안 피곤 해? 삼촌 말씀하시는데 눈도 안 마주치고. 잔소리 듣기 싫으면 오지마, 민망해 나두. 너 아부지 병원 가. 오지마 여기. "
* * * *
소년이 소녀를 처음 본 건 지난봄. 5층짜리 아버지 병원-정형외과 정문 앞이었다.
가지치기한다면서 애꿎은 가로수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서, 그늘도 하나 없는 인도에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큰 팻말을 목에 걸고, 기우뚱하게 목발을 짚고 서서 오후 내내 병원을 노려보았다. 병원의 책임을 호소하고 있었다. 팻말에는 꼬리뼈 내시경 수술이 잘못된 탓에 한쪽 하반신의 말초신경 장애와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병원을 들어오고 나가던 사람들이 가끔 그에게 다가와 병원 건물을 번갈아 보며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없는 사람처럼 그는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게 되었다.
병원 1층 대기실. 검은 유리문 안에 팔짱을 끼고 서서 그의 모습을 며칠 째 확인하던 원무과 과장은 그날도 혀를 끌끌 차고 올라갔다. 늦은 오후에 교복을 입은 소녀가 길 저편에서 깡총깡총 뛰어와 그 남자의 팻말을 뺐어들고, 한쪽 팔로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부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은... 홀린 듯 뒤를 쫓았다.
"... 언제까지 따라다닐 거야?"
소녀의 집 앞.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작은 벤치에 앉아 담배를 막 베어 물었을 때, 언제 내려왔는지 그녀가 벤치 앞에 서 있었다. 올려다봤다. 소녀의 얼굴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넘이가 막 끝나, 잉크색 어둠이 스며드는 언덕길을 오르며 자신의 이름이 '소원'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아버지의 소원. 산 중턱, 언덕 위의 녹슨 벤치 프레스에 털석 걸터앉은 소녀는 주머니에서 참치캔 한 개를 꺼내 발 밑에 두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때 숲 속 어디 깊은 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아주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경계를 하면서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다가왔다.
"... 이름? 그런 거 없어. 이름 같은 거... 책임질 수도 없는데 이름 붙이면. 나쁘잖아"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혀를 날름거리면서 참치캔을 바닥까지 긁어먹었다. 입맛을 다시며 소녀의 발목을 조금 스치고 돌다가 소년의 발목에도 다가와 느리게 꼬리를 휘감았았다. 어쩐지 이미 참치캔의 맛에 길들여져 버린 것 같았다. 어둠이 깊어지면서 인간의 도시에 인공의 불빛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소녀를 본 건, 오토바이 사장을 따라 간 <컨셉바>에서 였다. 그는 영업의 일환이자 특수한 목적으로 오토바이에 관심 있거나 이미 구매력을 갖춘 10대들을 데려와 대접했다. 건영상가 지하 2층은 다섯 개의 룸으로 나뉘어있었는데, 소년이 따라 간 방에는 전문가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소녀들의 대형 사진이 몇 개 걸려있었다. 반쯤 벗은 채 놀라서 뒤를 바라보거나 주요 부위를 가린 채 수줍게 웃고 있던 그 사진들 속에, 소녀가 있었다. 상훈은 몇 번 다시 보았고 그건 소원이 맞았다. 왜냐하면 양주 병을 들고 들어온 사장의 뒤를 따라 토끼 머리띠를 한 몇 명의 소녀들과 함께 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날 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당장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리를 떨치고 나와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가슴 없는 허수아비처럼 소년은 그 자리에 팔이 묶인 채 앉아있었다. 소녀는 웃고 노래하고 떠들었고 춤을 추었다. 토끼 머리띠는 의자 뒤로 던져버리고 술잔을 치켜올리기도 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거려서 다른 소년들이 팔을 뻗었다. 용기 있는 녀석이 그녀에게 어깨동무를 했고 그보다 더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녀석도 있었다. 소녀는 그 소년의 가슴을 무안하지 않게 밀어냈다.
"... 나 빨리 돈 벌어서, 공부할 거야."
그날 새벽이 다 될 때까지, 거의 모든 아이들의 취한 채로 소파에 아무렇게나 곯아떨어져 자고 있을 때. 소년은 먼저 1층에 나와서 소녀를 기다렸다. 화장을 다 지우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소녀가 마치 다른 별에 잠깐 다녀온 것처럼, 상훈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앉았다. 상훈은 갈 수 있다면 도로가 끝나는 곳까지 계속 달리고 싶었다.
* * * *
몇 개월이 지난 건영상가의 화재현장은 검게 그을리거나 뼈만 남은 건물의 흉측한 잔해를 감추려고 사방에 큰 가림막을 설치해두고 있었다. 상가의 맞은편에 서서 깁스를 푼 자신의 팔을 만지면서 상가 쪽으로 노려보던 소년은 가방을 고쳐 매고 돌아섰다.
* * * *
그날 오후. 종례시간... 상훈은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찾은 듯,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모호함과 불확실성 앞에서 두려워하는 눈빛. 감추며 강해지려는 안간힘. 그걸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사람의 절망감을 안다.
담임선생이 교탁 앞에 선 지, 5분이 지났지만. 여전히 떠들고 웃고 까부는 아이들 사이를 헤치며 천천히 걸어가 유리창 앞에 섰다. 소년은 바로 옆에 있던 의자를 조용히 들어 유리창을 내리쳤다. 작은 고통을 잠재우고 싶으면 더 큰 고통을 느끼면 된다. 교실은 조용해졌다.
- 계속
너였다면 - 정승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