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도망가자 10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by 목문수

전에는 강화도에서 한번 더 배를 타야 올 수 있는 외딴섬이라 했다. 사람 키높이를 훌쩍 넘는 갈대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며 시선을 가로막는 좁은 언덕을 돌아들어가면서 이런 곳에 골프장이 있다는 게 기괴하게 느껴졌다.


바닷가 염전부지를 막아서 만든 회원제 클럽하우스는 교감의 대학교 후배인 50대 건설업자가 오전 9시 55분으로 티오프 시간을 예약해두었다. 머리와 등은 철제 뼈대로 남겨둔 채, 얼굴에서부터 가슴까지만 하얗게 피부를 입힌 거대한 여성의 조형물 밑에 서서. 분홍색 폴로셔츠의 옷깃 세워 올린 교감이 또 다른 두 명의 중년 남자와 함께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예약자를 비롯한 네 명의 이름은 모두 전직 대통령으로 되어있었다. 법인 카드로 그린피를 계산했다고 손사래를 치치는 건설업자에게, 세 알에 만 오천 원 하는 골프공 열 꾸러미와 이 만 원짜리 장갑을 안겨주며 "이건 오늘 윤선생이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교감이 찡끗 윙크를 했다.


골프공 값을 계산을 하면서 여자는 오늘 자리의 목적이 기간제 미술 교사의 구직과 상관없는 것을 알았다. '박정희'라는 가짜 네임텍이 썩 마음에 들었던지. 캐디백에 이름표를 붙이며 씩 웃는 교육감의 표정을 바라보는 교감의 눈알이 반짝였다. 몸집이 크고 살이 붙었지만 매일매일 식단과 운동으로 관리한 것이 분명한 50대 중반의 남자. 장교육감은 경상도 억양에 표준어와 사투리를 섞었고, 반말과 존댓말을 교묘하게 오갔다.


"... 그런 느낌이 맞아요. 심껏 쌔리는 게 맞아. 그란데 윤정아 선생은 약간 상체를 나가면서 치잖아요? 그라카믄 공을 미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니지. 공이 안나가지. 심만 쓰지. 처음에는 다 그래요. 안그래요? 다운스윙은 자꾸 의식적으로 매일매일 연습을 해야지. 여기 서봐, 자세를 좀 잡아 줄께. 머리를 약간 뒤쪽에 두고 하체를 리드해야지. 그래 이렇게. 요로오케... 그렇지! 어차피 골반을 열면서 가져가면 이렇게 머리는 따라가... 다음에 또 언제. 기회 되면 봐주께. "


초면의 장교육감은 퍼팅 자세를 핑계로 노골적으로 여자의 허리와 골반을 잡고 몸을 밀착했다. 도마뱀처럼 혀를 내밀어 입가의 침거품을 닭은 교감이 카트에 올라타며 이렇게 덧붙였다.


" ... 예술하는 사람, 이러면은 우리가 편견이 있잖아요? 골프 이런 거는 관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딱딱한 생각이 재미없는거야. 안 그래요, 장교육감님? 교육자들한테는 어떤... 선이라는 게 있으면 사실 안 되는 건데. 오늘 윤정아 선생한테 배우네. 이렇게 골프를 또 치는 줄 몰랐지. 교육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수줍고 만나는 사람이 좁아. 그런데 또 미술하는 선생님하고 말도 썪고 공도 섞고 하니까 서로 발전하고. 안 그래요 장교육감님? "


추운 날에는 두꺼운 옷을 입고 모자에 장갑과 마스크까지 낀다. 최대한 맨살을 감추고 뒤뚱거리며 그날 하루는 버티는 거다.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는 날도 있다. 여자는 의도적으로 스치는 장교육감의 왼쪽 팔에서 몸을 떼며, 돋아나는 닭살을 쓸어내리려고 몸 안쪽으로 자신의 팔을 감쌌다.


샤워는 생략하고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온 로비에서 여자는 교감에게, 몸이 안 좋아 먼저 가겠다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 뭘 그렇게 놀래? 윤정아, 너 맞지? "



* * * *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운동 겸 주말 아르바이트로 캐디일을 한다고 했다. 지금처럼 날씨 좋은 가을에는 두 게임을 뛴 적도 있는데. 한 게임에 10킬로 정도는 걸어야 하는 중노동이라 아무리 돈이 좋아도 지금은 그렇까지는 못한다고. 고개를 흔들던 호선은 마티니 잔에 꽂힌 올리브를 한 개를 빼먹었다.



여자의 대학 동창인 호선은 사회체육을 전공하고 졸업 후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은 어느 봄에 훌쩍 결혼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며 골프를 가르칠 정도로 다정하고 능력 있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학창 시절 내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비싼 사립 여대의 학비를 조달하느라 일찍 철이 들었던 친구다.


주중에는 보험 회사 고객서비스센터에서 상담사를 관리하는 매니저로 일한다고 했다. 이혼 후 친정어머니와 함께 사는 데 어머니가 워낙 딸을 잘 챙겨주셔서 자기는 돈만 많이 벌어다주면 된다고.


"... 어릴 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무릎이랑 정강이가 그렇게 아프더니 요새 우리 딸이 나랑 똑같이 그런다. 방학 끝나고 10센치 컸잖아? 아프다고 다 병 아니야... 약한 척 하지마. 다컸어, 우리. 어른이야."



그날 밤.

샤워를 마친 여자는 문득 텅 빈 거실 바닥에 화구를 끌어와 늘어놓고 앉았다.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감싼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프러시안 블루를 조금 묻힌 뒤 물 떨어진 종이 위에 붓을 그었다. 바짝 마른 종이보다는 어느 정도 물기에 젖었을 때 색이 더 자유롭게 번진다. 푸른 물감은 젖은 종이 위에 천천히 번졌다.






-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WDaA_KFHe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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