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노화, 늙음, 낡은, 오래된, 숙성된...이라는 말과 에이징(aging)이라는 단어의 맛이 다르다. 영어 사대주의냐고 하면 풀이 죽지만, 어느 기사에선가 폐차되기 직전의 시트에서 떼 낸 가죽을 재활용해서 가방을 만드는 사람이 “에이징 된 것만큼 좋은 가죽이 없잖아요”라고 하는데... 저거네, 싶었다.
누군가의 등에서 부드럽게 체온을 흡수해 맨들맨들해진 표면, 정성껏 겪어낸 세월을 찬양하는 것만 같은, 그냥 에이징, 이라는 단어에 내 맘대로 붙어버린 감상이다. (네이버에 aging을 치면, 낡은, 늙은 노쇠한...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마음이 왠지 모르게 거칠거칠해졌을 때, 잘 에이징 된 배우가 나오는 영화만큼 위로가 없다.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고른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Our souls at nigh)>. 로버트 레드포드와, 제인 폰다 때문이라면 거짓말이고, 온전히 제목 때문이다.
“... 괜찮으시면 언제 우리 집에 자러 올래요?”
이웃집의 그녀(에디)가 제안을 해온 것은, 혼자 저녁식사를 끝내고 지루한 날씨 뉴스도 끝나갈 무렵, 이제 막 신문의 십자말풀이 면을 들여다보려는 찰나였다. 루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떤 대답도 못한 채, 맞은편 소파에서 양손을 꼭 잡은 채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를 바라본다.
“일종의 프러포즈인데, 청혼은 아니고요.. 어떤 면에선 그런 비슷한 느낌도 있지만.. 어쨌든. 우린 오랫동안 혼자 보냈잖아요. 사실 저는 외로워요. 내 생각엔 당신도 그럴 것 같은데.. 섹스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쪽으론 흥미를 잃은 지 오래되었어요. 밤을 견뎌보려는 거예요. 밤은 정말 끔찍하잖아요. 그냥 얘기나 하자는 거예요. 잠들기 전까지. 누군가 옆에 있으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 그냥 나이스 한 사람이요. ”
단숨에 쏟아낸 그 말들은 사실 오늘 밤, 그의 집 앞에서 돌아갈까 말까 서성이기 이전부터 아마도 더 오랜 시간 외로움의 앞 뒷장을 뒤척이다가 찾아낸 아이디어일 것이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좀 생각해봐도 될까요?”라고 소파 뒤편으로 기대앉았지만, 루이스 역시 견뎌내야 하는 밤들을 이해한다. 나도 만 번 이해한다.
영화 얘기는 여기까지. 요 며칠(2018년 3월10일)을 성폭력이라는 악몽에 시달렸다. 벗겨지고 내동댕이쳐지고 따귀를 맞은 듯 얼얼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얼굴이 뉴스 앵커의 뒷면에서 두 배 크기로 떠다니는 가운데, 애써 괴로운 기억을 퍼올리는 피해자의 메마른 입술을 바라보는 일은, 저녁 식사 후에 생방송 스너프 필름을 후식으로 맛보는 것만 같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주는 폭력과 고통. 한 사람이 대중에게 주는 배신과 기만. 대중이 한 사람에게 가하는 비난과 폭언. 대중이 한 사람에 해줄 수 있는 위로와 지지. 사람과 대중 사이에 좁은 통로, 그 통로의 문을 열고 닫는 손잡이를 쥔 언론. 개별 변수가 포함된 복잡한 함수 앞에서 나는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도 아닌데, 왜 잔인해지기만 하는 걸까.... 수포자의 기백으로 양손을 든다.)
사랑이 사랑으로 잊히듯, 사람은 사람으로 위로가 된다.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라도.
죽음의 저편으로 떠난 그리운 이들의 적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나이, 아득한 어둠이 지난 세월의 후회와 크고 작은 죄들의 고백을 강요하는 밤.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따듯한 -고기가 아니라- 사람과의 수다라고 말하는 이야기. 남자이고 여자여서 생기는 긴장감조차 약간은 시시하게 만들 수 있는, 에이징의 멋을 담아내는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섹스만 필요한 건 아니에요;;;) Our Souls at night>
2018. 3. 10
caetano veloso - Un Vestido Y Un Amor (옷 한 벌 사랑 하나)
https://www.youtube.com/watch?v=TShg_5FH49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