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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Dec 26. 2020

나의 아재씨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외할머니와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동경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책임감은 없는 서방이었다. 쓸모없는 지식을 사람들 앞에서 늘어놓거나 기타를 퉁기고 요정집을 들락거리며 탕진하는 일에만 매진했던.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젊은 시절부터 포목 장사로 돈벌이에 나섰던 그녀는, 주요 고객들의 신상 정보를 비롯 그들의 친인척까지도 명확한 특징을 잡아, 별명을 만들어 기억하고 있었다.


여든을 넘어 경도 치매약을 복용한 지 몇 년이 지난 시기에도 할머니의 기억 속의 사람들은 생생했다. 왼쪽 목에 기다란 털이 달린 큰 점을 가지고 있던 양조장 둘째 딸이라든지, 지금으로 치면 원형탈모 비슷하게 뒤통수에 큰 구멍이 나고, 눈을 심하게 깜박이던 동네 하급 관리, 얼굴에 곰보자국이 선명했던 이웃들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이 튀어나왔다.


할머니 기억 속에 수많은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자기 인생을 말아먹었"고, 또 거의 모든 남자들이 아내들보다 먼저, 어린아이들도 서둘러 사라져 갔다.  


어스름 저녁이면, 할머니가 들려주었던(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간난이 때 잠깐 품에 안겼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여전히 기억 속에서 낄낄거릴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방구쟁이와 욕쟁이와 거짓말쟁이가 사라져 갔음을 생각한다. 어느 여름인가에  "이제 거진 다 죽었다" 고 말씀하신 후의 긴 침묵을 기억한다. 그녀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슨 수로도 나는 그들을 대체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요즘 20대가 뽑은 아재 특징"이라는 글이 페이스북 친구인 아재들을 술렁이게 했다. 애꿎은 티셔츠 깃을 목 뒤로 올려 세우고, 슬리퍼 안에 양말을 정강이까지 끌어 신고, 점심시간에 주르르 추어탕집에 들어간다는 대목에 뜨끔뜨끔하면서, 아재네 아니네 아웅다웅했다.  


그걸 읽으면서... 사랑하는... 한때 사랑했던 모든 젊은이들이 이제 아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나 역시 키득거렸다. 나 또한 나의 세대와 함께, 젊었다가 나이들고, 늙어서 사라지겠구나. 2020 이라는... 그리 깊이 생각치 않던 지구 위의 시간을 살고, 이 기쁨과 비극의 순간들을 기억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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