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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Mar 26. 2021

세월을 돌아, 내 얼굴을 만났다

-문화무크지<통조림>에지원했던그분을떠올리며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다른 분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보게 되면 좋겠습니다"


...  단체메일이더라도 이런 답신을 받는다면, 정말 감사한 케이스다. 공고가 있던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경력을 적은 이력서와 간단한 프로젝트 아이디어(방송 소감 등)를 보내면, 답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되었는지 협회 구인란을 뒤지고서야 "완료"를 확인한다. 선배 작가에게 신세한탄을 하니 돌아온 답은 "이제 그런 나이지. 경력은 또 부담스럽고..." 그의 말줄임표 뒤에 숨은 한 마디를 안다. "실력은 미덥잖고"

비자발적 퇴출을 실감하는, 퇴물 작가. 방점을 찍어놓고... 생각한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2000년대 초반, 지금은 꼰대라 여겨지는 40대들이 한창 20대일 때... 이상하게 일렁이던 환상과 희망이 휩쓸던 시간이 있었다. "조크등요" 또는 휴대폰으로 대변되는 <개인주의>. 그런지 락, 홍대 언더그라운드 밴드, 독립영화 등... 의 문화운동(?) etc.


막 이직을 했던 두 번째 회사는 <프로젝트 409>라는 디자인 회사. 소위, <문화 무크지>라는 전에 없던 비정기 간행물 <통조림2권>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사동 조용한 주택가에 있던 사무실도 압구정동 번화가 2층으로 막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40대 초반 디자이너 출신의 사장님은 스포츠카를 타며; 재즈와 뮤지컬을 좋아하는 분이었고, 사무실에는 당시 핫한 디자인 잡지들 <와이어드>나 <I-d> 같은 책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사수였던 편집장님도 이공대 출신이지만, 현대 철학에 심취해있고 꼰대력이라곤 1도 없는 쿨가이였다. 내게 내려진 지령이라곤 무조건 "재밌는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고, 소재나 내용의 제약, 제작비와 마감의 제약도 없는 완전히 방임에 가까운 자유가 주어진 상황이었다. 큰 월급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만나고 싶은 누구라도 만나 인터뷰를 해도 되었고, 가능한 선에서 재능 있는 디자이너나 만화가 예술가 누구를 섭외해서 그의 작품을 싣는 것에도 반대가 없었다.   


프로젝트의 꿈은 원대했는데, 정작 책 한 권을 만든다는 게... 편집장님과 나. 둘이서는 좀 버거웠다. 물론 내 실력의 문제였다. 이미 대학 때부터 당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다루었던 "쌈지"나, 노래방에서 후원해주던 잡지 "질러"등에서 필력?을 다져오긴 했지만, 전 직장- 잡지 <나이고 싶은 나>-를 홧김에 뛰쳐나온 2년 차 신입 기자. 열정과 실력은 별개. 한 주제를 깊이 있게 끌고 갈 "읽을만한 책"을 만드는 데는 공력이 필요했다. 효율적인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서... 필력 좋은 한 사람 정도가 더 필요하다는 판단에 구인공고를 내게 되었다.






- 새로운 문화, 음악, 사회 전반에 대해 관심이 많을 것.

- 글쓰기를 좋아할 것. 자신의 문장력을 나타낼 샘플 첨부.

- 나이 / 전공 / 경력 무관.

- 압구정 출퇴근 가능자. 출퇴근 시간 자유.


보수는 많지 않았지만 끌리는 공고임에 틀림없었다. 무려 출퇴근 시간도 자유라니?!(출근은 자유인데... 퇴근은 자정을 넘을 때가 많았다. 이명호 실장님~~! ) 그렇게 편집장님이 고른 몇 사람, 내가 고른 한 사람의 구직자를 인터뷰했던 날. 그날의 내 모습을 떠올릴 때면, 조금씩 더 얼굴이 화끈거린다. "난 누구라도 좋아. 그래도 같이 일할 사람이니까, 자기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 편집장님은 신입 기자의 채용에 내 판단과 결정을 전폭적으로 반영해줄 것이라고 확언했다.



몇몇 사람들이 수줍게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사장의 컬렉션이던 디자인 서적과 여러 커다란 조형물, 찬란한 포스터의 사진 액자, 레고 인형, 엘피판과 시디들로 한쪽 벽면이 꽉 찬 층고가 높던 유리방은 그 자체로 위압감을 주었다. 이력서와 함께 출력된 문서 파일은... 대게가 일기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더러 대학 때 학보에 기고한 기사도 있었지만, 새로운 감각을 표현했다기보다는 기사 같은 글을 흉내 낸 것에 가까웠다. 번들번들한 탁자 위에 그런 문서를 몇 장 꺼내놓고 앉아있으면 사람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안다.



그중에 한 명, 시를 보낸 사람이 있었다. 전공과 경력도 딱히 필수사항이 아니었고, 필력을 드러낼 글을 첨부하면 된다고 했으니... 시를 낸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편집장님이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판단의 가장 큰 이유는 나보다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이었지만, 말은 이렇게 했다. "... 이 분은... 잡지 기자 보단 문학 쪽일 거 같은데요..."



그분이 왔다. 그분의 모습은, 그녀의 시와 비슷했다. 수줍었다. 어떤 질문이든 대답하기 위해 한참 생각했고, 꺼내놓은 대답 역시 말줄임표가 훨씬 많았다. 그렇지만 편집장님은 그녀의 뜨문 뜨문 이어진 짧은 대답에서 고개를 깊이 끄덕이거나...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동의하는 듯했다.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당시의 내가 보기에 너무 '20세기 문학적'인 분위기였다. 아냐 아냐, 이거 아냐.




편집장님과 나의 의견은 갈렸다.

철학과 과학 분야를 좋아하는 그와, 예술과 인터뷰에 강한 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 분야를 보완해줄 그녀를 뽑고 싶어 했지만. 나는 '우리 잡지'는 '그런 잡지'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말끝마다 "에잇, 20세기 사람들 같으니라고"라는...  다소 버르장머리 없는 땡깡은 언제나 통했다. 편집장도 발행인이던 디자이너 출신의 사장도 "20세기"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며 물러섰다.


그래서 나는... 아직 채용을 결정하지도 못했는데, "저는 왜 안 뽑힌 건가요? 다음 기회를 위해서라도 이유를 알려주세요."라는, 도발적인 메일을 보내온... 가장 나이 어렸던 면접자를 최종 나의'부사수'로 뽑았다.(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 감히 20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에... 누군가의 능력과 가능성을 맘대로 가위질하던 첫 면접관이 되어본다. 그날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던 질투와, 부담감, 혹은 거부감의 정체를 똑바로 바라본다. 거기에 나를 더 성장하지 못하게 한, 작지만 아주 확실한 약점이었음을.


그때 내 능력보다 넘치게 내 의사가 수용되었던 것은... 단지"새롭고, 젊고"싶었던, 제작자와 편집자의 아량때문이었는데, 실제로 내가 가진 것은 실력이 아닌, "젊음" 뿐이었음에도.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대 여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던 30대 초반, 구직자의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었다. '저 나이에, 이런 일-보수도 적은-에 지원한다는 건, 그간의 무능력의 다름이 아닐지도 몰라.'라고. 결국 20년 후에... 나는 필연적으로 그녀와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20대 중반에 이미 꼰대였던 나.

세상에 많은 보이지 않는 기준에 좌우되고 타인을 재단하면서... 결국 그런 편견을 스스로 입증하면서 가장 크게 상처를 입힌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남 앞에 자신의 시를 펼쳐놓았던 그분은 아마 그 날의 면접으로 작은 상처를 받았을지는 몰라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인생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잡지사 면접에 시를 내놓다니! 이렇게 전략이 없을 수가'라고 핀잔했던 나는... 세상이 원하는 형태의 나로 미리 끼워 맞추고 그런 척 살아가려다... 실제로 나 자신이 잘하는, 진짜 내 장점은 무엇인지는 희미해져 버린 중년이 되어버렸다.



인생은 성공보다는 거절과 실패의 순간에 더 많은 교훈을 주는지도 모른다. 만만하게 보았던 세상이 그 너그러움을 던지고... 이제 진짜를 내놓으라 할 때, 진짜가 아니고서는 대답할 게 없다. 철부지 20대, 30대의 나는 어림없는 블러핑으로도 어떻게든 적응할 수 있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요 모양 요꼴의 된 것이다. 거절과 거부의 순간들을 만나면서... 담담하게 나 자신을 응시하게 되었고. 이제야 내 그림자의 외곽선이 분명해진다. 용케 지금까지... 참, 운좋았어.



가끔 그 면접 자리로 가서 그녀의 자리에 가만히 앉아보곤 한다. 면접관이 출력도 하지 않은 그 많은 이력서와 함께.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이제야 펼쳐보지도 않았던 그녀의 시들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받아보지 못한... 하지만 나 역시 잘 대답할 수 없을 것이 뻔한 질문에, 머리를 긁적이고 일어선다.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나가면 큰 거리가 나올 테니 일단 좀 걷자. 마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얼만큼을 걸어도 괜찮다.




https://www.youtube.com/watch?v=QWKtvwDpH5A&list=RDGMEMCMFH2exzjBeE_zAHHJOd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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