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도망가자 6

시시한 불행

by 목문수



일요일 오후.

소년은 주유소 바깥 유리문 앞에 서서, 계산대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흘낏 그 모습을 본 20대 후반의 아르바이트 생이 그때 막 울리는 사장의 전화를 다급하게 받으며 짜증 섞인 대답을 이어갔다.


"... 아니요. 아직도 안 가고 있어요. 네, 문 앞에요. 얘기했다니까요 잘? 걔 알바 정산을 왜 너한테 하냐, 너는 죽은 얘 아르바이트비까지 삥땅 뜯으려고 하냐... 경찰 부를 거다. 네? 그냥 신고해요? 업무방해?..."


전화를 끊은 아르바이트 생은 결심한 듯 카운터를 돌아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훌쩍 키가 큰 소년에게 다가섰다가, 다시 두 발짝 뒤로 물러선 후.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얘기를 시작했다. 소년은 아르바이트생을 계속 노려봤는데. 당황한 알바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소년의 어깨를 확 밀쳤다. 어쩐지 자신감이 붙은 알바는 소년의 어깨를 몇 번 더 밀어붙혔고... 깁스한 한쪽 팔을 휘청이며 뒷걸음질 치던 소년이 바닥에 넘어졌다. 그때, 막 주유를 마치고 도로 쪽으로 나가려던 차가 진로 방해에 짜증이 난 듯 클락션을 크게 울렸다. 아르바이트생은 미안하다는 의미로 모자를 얼른 벗으며 쪼르르 운전자 쪽으로 가서 손을 휘저어 진행 방향을 안내했다.



* * * *



죽은 소녀의 집은 낡은 임대아파트 3층이었다. 집 앞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서 보면 소녀의 집에 불이 켜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아버지가 거실에 나와 어둑해진 거실에 불 켜는 모습을... 소년은 쪼그리고 앉아 담배의 마지막 모금을 들이키며 가만히 바라봤다. 탁하고 남은 담배필터를 튕겨 바닥에 버릴 때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소리를 내며 소년의 발치에 와 앉았다.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참치캔 하나를 따서, 고양이 앞에 두었다.


"... 잘 있었냐. 고양이?... 좀 컸는데?... 뭐 먹고 큰 거야...? 그 누나는 이제 안 와. "



* * * *



"... 애비를 보면 인사를 해야지. 자식이... 키우는 사람, 보람 없게. "


새벽 4시. 조용히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던 소년은,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며 위스키를 마시던 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크리스털 잔에 담긴 마지막 위스키 한 모금에 수면제 한 알을 털어 넣고 일어났다. 싱크대에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을 붓고는 탁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부엌까지 이어지는 긴 사선의 동선을 지나가며 둘은 한 번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정형외과 의사인 아버지는 겉으로 보면 전혀 문제없는 사람이었다. 대놓고 외도를 하고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는 정신병자였어도 의사인 만큼 겉으로 티 나는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의 불행이 흔한 것임을 알았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멀쩡해 보이는 가정에 도사린 불행. 하지만 그 흔하다는 게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이 불행이 까발려진다한들. 그때 주어질 잠깐의 측은한 눈빛들, 더한 것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다. 몇몇 이혼 가정 친구를 통해 들은 지난한 부모의 이혼 과정. 양육권 분쟁과 곤란한 마음. 그건 사실 소년에겐 부러운 상처였다. 그런 과정을 감내하는 부모는 최소한 정직하고 자식에게도 예의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소년이 기억하는 최초의 폭행은 네 살 때였다. 무슨 일인지 엄마의 어깨를 잡고 흔들던 아버지는 소년을 방에 가두며 "기어 나오면, 너도 재미없어"라고 외쳤다. 그때, 아빠는 엄마의 목젖을 한 손으로 밀다가 타박상이 잘 남지 않는 쇄골 쪽을 꽉 눌러 쥐어 비명을 지르게 했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소파에 있던 방석을 가격 부위에 던진 뒤 수십 번 발로 찼다.


모든 싸움의 풍경을 문틈으로 물끄러미 바라본 소년이 아침 식탁에 앉아 엄마에 "재미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물었고... 엄마가 손을 떨다가, 물병을 떨어뜨렸다.


멀지 않은 시기에 폭행은 소년을 찾아왔다. 아홉 살이던 소년이, 수학, 과학, 사회, 국어에서 모두 90점을 받아온 날, 아버지는 퇴근하자마자 넥타이를 거칠게 풀고 소년을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이따위 점수를 맞아 올 수가 있느냐. 해 달라는 거 다 해주었는데. 모자란 게 뭐 있다고 이런 식이냐, 너는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이냐"라고 어깨를 떠밀었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에 놀란 소년의 입에서는 하품이 나왔는데, 세 번째 하품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아홉 살 소년의 뺨을 내려쳤다. 휘청거리면서 벽에 부딪힌 소년은 바닥에 쓰러졌고 엄마처럼 방석을 뒤집어쓴 채 발로 밟혔다. 소년의 엄마는 얼른 빌라면서 소년을 감쌌지만. 소년은 왜 그렇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미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아버지는 "둘 다 눈앞에서 꺼지라"라고 소리를 지르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소년의 부모는 이혼하지 않았다.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의 사회적 위신을 지켜주는 냉랭한 협력관계를 이어갔다. 소년의 외할아버지는 인근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40년 넘게 운영한 대형 교회 목회자였고, 딸의 이혼을 알려 목사의 권위에 흠집을 내느니. 형식적인 결혼생활이라도 만족할 만큼 넉넉한 생활비를 보태는 편을 택했다.


소년의 엄마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활기차게 변했다. 교회 성가대 반주를 다시 시작했고, 주중에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여러 종류의 강습을 들었으며 오후 내내 쇼핑을 하고 가방과 옷가지가 든 백화점 봉투를 들고 집으로 왔다. 신발을 벗으면서 내려놓은 백화점 봉투가 며칠씩 현관 앞에 그대로 있는 날도 있었다. 기분 내키면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도 잦아졌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아침마다 전화가 왔고, 집에서 하루 종일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대신 아버지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누나들 중 한 명이 가끔 집에 와서, 마치 자기가 이 집의 안주인 인양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풍경을 보게 되곤 했다. 간호사는 병원에서 볼 때와는 달리,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거나, 몸에 딱 붙는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누나들은 때때로 소년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아버지 대신 주는 거라며 오만 원짜리 서너 장을 꺼내 용돈을 주기도 했다.


소년은 자신의 몸이 성인의 것으로 조금씩 변하면서. 거울을 볼 때마다 무서웠다. 얼굴의 윤곽이나 눈썹의 진하기, 솟아오르는 콧등의 굴곡이 아버지를 똑같이 닮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2층 계단참에서 내려오던 엄마가, 자신을 보며 얕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소년은 문을 잠근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잔인한 영상들을 무음으로 찾아보곤 했다. 부엌에 칼집을 볼 때면 누군가를 침착하게 찌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칼을 찌를 때 꽉 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뼈와 관절 사이에 정확한 각도로 힘을 줘서 찔러 넣어야 저항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상상 속에 일그러진 얼굴은 언제나 아버지였다가 다시 자기 얼굴로 바뀌었다. 이런 부모라면 차라리 없었다면 좋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소년은 부모가 없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부러웠다.





-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K128GBMOV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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