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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Sep 07. 2021

더 이상 난쏘공을 가르치지 못하는 국어교사

  고등학교 때 배운 조세희의 난쏘공은 도시빈민의 비참한 삶을 가르쳐 주었다. 소설은 낙원구 행복동 판잣집의 한 가족이 본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날아든 철거 계고장을 받아 들며 시작된다. 새 아파트의 입주권은 주어졌지만, 아파트 입주에 필요한 돈이 없어 절망하는 난쟁이 가족. 결국 분노하던 형제는 일하던 공장에서마저 쫓겨나고, 딸은 부동산 투기꾼에게 험한 일을 당한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아버지는 공장 굴뚝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들이 발 디딘 삶의 터전은 행복한 낙원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과 욕망이 득실거리는 절망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후 난 재개발을 부동산 투기꾼들의 도박판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도시 정비와 주거 환경 개선은 허울 좋은 명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40년이 지났지만, 조세희가 그린 현실과 내가 디딘 현실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나머지 25%의 의사는 다수 의견과 법에 의해 묵살된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한 분담금을 내지 못하는, 돈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외곽으로, 변두리로 떠나야만 한다. 실제 재개발 지역의 원주민 정착률이 채 10%가 되지 않는다는 뉴스 기사를 볼 때마다, 70년대를 살아간 수많은 낙원구 행복동 주민의 얼굴이 떠오른다.

  현재는 익숙한 과거를 되풀이하며 존재한다. 2009년 용산 재개발 참사는 흐르지 않아 썩어가는 제도의 모순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철거민이라는 덩어리로 묶인 존재들이 자본의 힘과 권력에 추방당하기를 거부하며 몸부림쳤다. 탐욕스러운 자본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21세기 난쟁이들의 모습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12년이 지난 2021년의 오늘. 난 내 지난 믿음과는 달리 재개발 지역의 한 빌라를 매수했다. 정확히 말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 국가에 압수된 재산을 낙찰(공매) 받은 것이다. 지난 삶을 스스로 부정하는 선택을 하게 된 건, 그만큼 내 자아가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뉴스로만 접하는, 폭등하는 누군가의 자산을 바라보며 벼락 거지가 될까 무서웠고, 비혼의 삶을 선택한 내가 마주할 잿빛 미래의 잔상이 나를 괴롭혔다. 성실한 노동만으로는 이 싸움에서 버티지 못해 쓰러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흘러간 시간을 보상받는 유일한 방법은 내 신념과 철학을 버리고 자본의 법칙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라 판단했다.

  지난 1주일, 주택담보대출을 받기 위해 수많은 은행을 돌아다니며 상담을 받았다. 주민등록등본을 비롯한 각종 서류를  번이나 출력했는지 모른다. 가는 은행마다 나처럼 대출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 붐볐다.   기다림에는 탐욕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누군가의 절박한 삶과 누군가의 탐욕이 뱉어내는 냄새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공간에서,   순서를 놓치지 않으려 대기번호표를 힘껏 움켜쥐었다.  표가 실체를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유일한 승차권처럼 여겨졌다.  열차를 놓쳐서는  된다는 절박함,  절박함이 나를, 나의 신념을, 나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 것이다.

   내 신념의 무게가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을까. 난쏘공을 가르치며 낙원구 행복동이 지닌 반어적 상징의 의미를 가르치던 나였다. 70년대의 부조리를, 변화되지 않은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던 나였다. 그렇게 신념과 삶, 삶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고 믿었던 나였다. 그런데 이 자기부정을, 자기모순을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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