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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Mar 13. 2023

느릿하게, 앞으로


  새해 목표 중 하나는 능숙한 자유형이다. 바닷가 근처에 살았고, 여행을 다니며 묵는 호텔에는 늘 수영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수영을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 선베드에 드러누워 사진만 찍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선택한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짧게 주어진 쉼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수영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수영은 나에게 생존과 체력 증진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더 의미 있는 여가를 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았다. 우선 많은 물품을 사야 했다. 무엇을, 어디서 사야 할지 몰라 블로그와 유튜브를 뒤졌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기준대로 물건을 추천했다. 쿠팡에서 수영복, 수모, 수경 등 이것저것을 검색해 장바구니에 서툴게 담았다. 수영장에서 다들 습식 수건을 쓴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 뒤늦게 장바구니에 추가했다. 일시불로 결제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배송된 물품을 하나하나 뜯어 살펴보았다. 그러곤 유튜브에서 수영 가방을 싸는 법을 찾아 하나하나 따라 했다. 블로그에선 수영장에서 유의해야 할 점을 검색해 하나하나 정독했다. 혹시나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수영 강습 첫날, 무거운 수영 가방을 들고 수영장에 들어섰다. 초보반은 총 3명이었다. 강사님은 숨 참기부터 가르치셨다. 물속에서 일정 시간 동안 코로 숨을 쉬고, 물 밖에서 입으로 숨을 들이마시는 연습을 반복하라고 했다. 이후에는 발차기를 배웠다. 발등을 곧게 편 상태로, 물을 꾹꾹 누른다는 느낌으로 차야 한다고 했다. 무릎은 굽혀도 되지만, 과하게 굽히면 물과 접하는 면적이 좁아지니 무릎은 적당히 굽혀야 했다. 이틀 차엔 물에 뜨는 연습을 했다. 몸에 적당히 힘을 뺀 상태에서 엉덩이가 수면에 근접해야 몸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다음 날엔 팔 돌리기를 배웠다. 수면 아래에서 힘껏 물을 잡아 뒤로 넘기되, 수면 위에서 팔의 각도를 적당히 바꿔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날마다 배우는 하나하나의 동작을 숙달하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강습이 끝나고도 수영장에 남아 혼자 ‘적당히’와 ‘힘차게’의 각도와 세기가 몸에 자연스레 배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수영 강습 5일 차, 오늘부터 모든 동작을 연결해서 반복하라는 게 아닌가. 이제부터 물을 꾹꾹 누르며 발을 차고, 적당한 각도로 팔을 돌리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중간중간 숨도 들이마시면서. 여전히 판을 잡은 상태였지만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몸에 힘이 들어가고, 엉덩이가 가라앉았다. 팔을 힘껏 돌리면서 그 짧은 순간에 숨을 쉬어야 하는데, 매번 물을 먹기 일쑤였다. 기껏 숨을 쉬었다고 생각하면, 발 차는 걸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강사님은 여유롭다. 칭찬과 격려를 섞어가며 나아지고 있다고 말씀해 주신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초보 레인에서 영원히 맴돌까 봐 두렵기만 하다. 초조한 마음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잘하는지를 신경 쓰게 된다. 능숙한 자유형으로 레인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다 제풀에 지쳐 그만두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이 물 아래에 잠겼다가, 다시 떠오르길 반복한다.

  강사님은 25미터 레인을 왕복한 뒤 어깨를 주무르는 나를 보며 자신에게 맞는 팔 각도를 찾지 못해서라고 하셨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팔의 각도. 그 적절한 각도와 움직임은 오로지 본인만이 발견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잘못된 자세와 동작을 교정해 주는 건 본인의 몫이지만, 그 외에는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느낌을 받아야만 발전이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 순간 이전 강습 시간과 달리 내내 옆 사람과 옆 레인을 바라보던 나를 자각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내 앞에 놓인 25미터의 레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르칠 때는 알지 못했던 배움의 두려움이 어색했다. 그 자리엔 부족할까 봐, 실수할까 봐 누군가의 경험과 기호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한 내가 있었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두려워하며, 앞서 나가는 누군가를 질투하는 내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학생들을 몰아붙이기 급급했던 지난 과거를 떠올렸다. 너만의 호흡과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라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내 조급함도 부끄럽게 떠올랐다. 내 칭찬과 격려로도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했을 학생들의 걱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르치는 사람의 가장 큰 미덕이 배움에 대한 겸손임을 왜 알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수영 가방 속 물품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부딪쳐 경험하니 필요 없는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수영장용 샴푸와 헤어트리트먼트, 물기를 머금은 습식 수건을 뺐다. 대신 건조기로 돌린 뽀송한 수건을 넣었다. 수건은 부지런하게 빨고 말리면 될 일이었다. 무거웠던 가방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음 주 강습도 여전히 자유형이다. 자유형만 6개월을 배우는 강습생도 있다는 강사님의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6개월이면 어떻고, 1년이면 어떤가. 느릿하게 가도 될 테다. 앞으로만 가면 될 테다. 그 마음으로 허공을 향해 끝없이 팔을 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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