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지팡이를 찾아서
별별 것들이 다 있다.
갈색 가죽 소파같이 생겨서 누가 ‘이거 변기예요!’ 말하지 않으면 감쪽같이 속을 것 같은 간이변기부터
웬만한 스쿠터 뺨치게 깔쌈하게 생긴 핫한 레드 컬러 보행기까지. ‘그래도 나 이거를 끌고 걸어서, 마트에 장도 보고요. 다리 아프면 여기에 앉을 수도 있답니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멋쟁이 장바구니 보행기도.
피부는 소중하니까! 욕창방지 필수템인 울룩불룩 욕창 방지 패드, 귀여운 핑크색 미끄럼 방지 수면양말, 동그라미 눈알 그림이 ‘안 아파요’라고 외치며 쳐다보고 있는 동전 파스까지.
‘복지용구 대여, 판매’란
노인장기요양보험 대상자에게 일상생활, 신체활동 지원 및 인지기능의 유지, 기능 향상에 필요한 용구를 구입하거나 대여하여 줄 수 있는 서비스다.
복지용구의 종류는 앞서 말했듯이 이동변기부터 성인용 보행기, 안전손잡이, 욕창예방 매트리스, 이동침대, 요실금 팬티 등 굉장히 다양하다. 상황에 맞는 용구를 선택해서 구입 또는 대여가 가능하다.
해당 지원은 연간 160만 원까지 이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본인 부담금은 전체 금액의 15% 로로, 나머지 금액은 장기 요양 보험에서 대납해 주는 개념이라서 부담을 덜고 구입이 가능하다.
혁이씨는 몇 달 전,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거리도 가기가 어려워서 간이 변기를 샀었다. 다행히 지금은 상황이 조금 호전되어서 간이 변기는 비닐에 고이 싸여있다.
쇼핑도 쇼핑이지만 간이 변기라니. 이런 문물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간이 변기를 사는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십리를 걸어서 다녀도 끄떡없던 소녀는 어느덧 자기 집 안방에서 변기까지 가는 길도 험난하다 느껴지는 67세 어르신이 됐다.
복지용구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그러지 않을까 싶다. 사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 이런 것도 있다.’ 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쓰리다.
혁이씨는 방문요양센터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대학병원 재활치료 선생님으로부터 성인용 보행기와 지팡이 사용을 강력 권함 받았다. 왼쪽 편마비 증상으로 인해 오른쪽으로만 몸의 무게중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혁이씨는 무엇을 사든 간에 신중한 타입이다. 한 번 산 옷은 웬만해선 십 년을 넘게 관리해서 입는 그녀에게 충동구매란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티셔츠를 사는 다 큰 딸의 일상에서나 있는 일이다.
그는 복지용구를 살 때도 역시나 깐깐하다. 색깔이 칙칙하지는 않은지, 들고 다니면 너무 튀진 않은지, 무게는 적당한지, 관리하기 편한지.
우리는 매주 목요일마다 대학병원에 가는데, 운동재활치료를 하기 위함이다. 그곳은 복지용구 유저들의 공간이다.
혁이씨의 눈이 지나가는 할아버지의 지팡이에 멈춘다. 복지용구에 있어 후배인 혁이씨는 처음 보는 지팡이다.
할아버지의 지팡이를 응시하며 조용히 나를 부르는 그의 음성. ‘어머 저거 괜찮다. 이거 네 발 달린 지팡이. 네 발 달렸는데 발들도 작은 게 갖고 다니기 안정감 있고 딱이다. 저거 어디서 샀을까. 저 할아버지’
나를 부르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분명 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관심 있게 보면서도 척하고 알아듣지 못해서 ‘인터넷으로 한번 봐보자’하고 딴청을 피운다. 그러다 결국 나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어르신 혹시 이거 모델명 사진 찍어도 되나요?’ 그럼 복지용구 선배 할아버지는 흔쾌히 사진을 허락한다. 자기 자식이 알아봐서 사줬다는 자랑과 함께.
그래, 나도 한번 그런 자식 되어보자.
병원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
‘딩동’
돈 내라는 문자다. 얼마 전, 보행기를 구입한 복지용구센터에서 온 연락이다. 66만 원짜리 보행기는 본인부담금 3만 원대가 되어 명세서에 찍혀있었다. 놀라운 명세서. 요양등급의 힘은 이런 것인가.
생각해보면 무슨 기술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원가가 66만 원이라니. 해당 지원이 연간 160만 원까지 이용이 가능하다고 해서 일부러 복지용구들의 금액을 높이 잡은 건 아닌지? 잠시 생각해보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쓸데없는 고민이다.
오늘이 나의 월급날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보행기3만원과 택시비 9천원 플렉스. 이제 혁이씨도 어디 가서 ‘어머 이거 어디서 샀어요?’했을 때 ‘우리 딸이 알아봐 줬어요’하고 답하려나.
집에 돌아와 문제의 그 네발 지팡이를 찾아본다. 지팡이도 공용 지팡이가 있고, 남성용 지팡이가 있고, 여성용 지팡이가 있다.
혁이씨를 옆에 앉힌 채, 모니터 앞에서 한참을 복지용구 사이트를 뒤적였지만 아까 봤던 그 할아버지의 지팡이는 온 데 간데없다.
스크롤을 내리는 검지 손가락에 쥐가 날 지경이다.
우리가 간과한 부분.
문제는 그 지팡이는 남성용이라는 것이었다.
올 블랙, 네 발이 달린, 바퀴가 작은 그 지팡이.
여성용에 왜 그런 것은 없는 걸까. 여성용 네 발 지팡이에는 요상하고 귀여운 꽃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혁이씨는 깔쌈한 올블랙을 찾으며, 아까 봤던 그 할아버지의 바퀴보다 다 바퀴가 커서 못쓴 다한다. ‘그런 건 없어. 혁이씨. 혁이씨를 다 만족하려면 그냥 만들어야 돼.’
오늘도 지팡이 쇼핑은 실패에 그쳤다.
무한 스크롤에 나의 검지는 지쳤다.
그래도 몸은 무너졌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쓸데없는 건 사지 않겠다는 감각은 무너지지 않은 혁이씨를 보며 한편으론 다행이라 여긴다.
상품들에는 저마다 광고 문구가 있듯이. 복지용구 상품들도 내세우는 문구가 있다. ‘미끄럼 방지!’ ‘욕창 방지’ ‘넘어짐 방지’ ‘ㅇㅇ방지’
‘이것이 없으면 스스로 서기 어려울거야.’
‘이것이 없으면 몸에 나는 진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거야.’
‘이것이 없으면 두 발이 있어도 어딘가로 이동하기 쉽지 않고, 이것이 없으면 자칫하다 바지에 실수해버릴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너 따위 필요없어!’라고 쿨하고 싶다만 슬프게도 그것이 사실이다.
복지용구들이 줄 수 있는 도움 덕분에 혁이씨와 복지용구 유저들은 조금 더 몸과 마음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자존감 무너지기 방지! 좌절 방지! 자존감 절대 지켜!
나는 늦은 밤 우리집 아저씨 최씨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짜파게티 요리사가 흔쾌히 되어준다. 나는 그가 짜파게티를 왜 먹는지 알기 때문이다. 갈색 윤기라 좌르르 도는 짜파게티를 접시에 담아, 냉장고에서 최씨 할머니가 얼마 전 주신 푹 익은 달랑무김치를 내어준다.
나는 나만의 할머니, 혁이씨의 온기가 느껴지는 옆방으로 잠시 들어간다. 혁이씨의 온기로 데워진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아직 이렇게 따뜻해서 다행이다.
‘그래도 나 이거를 끌고 걸어서, 마트에 장도 보고요. 다리 아프면 여기에 앉을 수도 있답니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장바구니 보행기 유저 혁이씨와 함께 그녀의 원활한 보행기 운전과 장보기 소원성취를 응원해보며, 곧 낙엽이 지고 추위가 찾아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같이 걸어야겠다.
비록 지팡이를 짚어도 우리에게 다가 올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나는 복지용구 사이트를 뒤적인다.
* 올 블랙, 네 발이 달린, 바퀴가 작은 그 여성용 지팡이를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