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산업시대 이후 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개인의 무제한적인 자유에 대한 약속은 인류의 희망과 믿음의 토대였다. 하지만 행복은 욕망의 무제한적인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많이 탐욕스러워지는 현상을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리고 위의 약속을 토대로 발전한 경제체계는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 것인가 보다는 경제체계의 성장을 위해 무엇이 좋은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자연은 파괴되고, 인간은 병들고, 사회는 파국으로 달려간다. 이러한 파국에 맞서기 위해 인간의 두 가지 실존양식인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분석한 후, 파국에 대처할 선택의 가능성을 구명하고자 한다."
위의 글은 책의 서문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다. 2021년 현재 지구는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 추구로 인한 여러 가지 재난을 겪고 있다. 평균 기온 상승과 연관된 가뭄, 홍수, 산불 등의 재난과 코로나19까지.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놀라운 점은 이 책, <소유냐 존재냐>가 1976년에 쓰였다는 점뿐이다.
위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이 책의 목적은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분석하고 파국에 대처할 대안을 말하는 것이다. 목차를 보면 더 명확하다. 1부는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2부는 '두 실존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3부는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이다. 차례대로 따라가며 내용을 알아가자.
'소유하다'는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이며 '존재하다'는 '여기에 있다'라는 의미 정도로 우리는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약간 더 깊게 들어간다.
내가 의미하는 존재나 소유 개념은 "나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라든가 "나는 백인이다", 또는 "나는 행복하다"라는 식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 한 주체가 지닌 어떤 개별적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의 근본적 실존 양식이다. 자기 자신과 세계를 대하는 두 갈래 다른 방향의 지조이고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의 성격구조이다. 그중에서 어느 쪽이 우세한가에 의해서 한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이 결정된다.
인간의 두 가지 근본적 실존양식은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이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의 존재한다는 그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이 책의 예를 빌려오자면, 소유적 인간은 독서를 소비행위로 인식하고,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마치 자기 자신의 기억들을 헤집어본 듯이 현실감 있게 이야기를 소유한다.' 반대로 존재적 인간은 소설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통찰하고, 스스로에 대해 무언가를 깨우친다. 이처럼 두 가지 실존양식인 소유와 존재는 단순한 특성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방향은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고찰했다.
이 고찰들은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는 결론을 허용한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 것으로 하려는 성향으로서 궁극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 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 실존의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 ······ 우리는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아울러 우리의 결정은 그 어느 한쪽 성향으로의 해결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소비하고, 소유하고, 탐욕하고, 지배하는 것 만이 인간의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는 생각, 혹은 그 탐욕적인 인간의 본성을 잘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들은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다. 실제로도 탐욕적인 사람이 봉사하는 사람보다 많다. 하지만 저자는 그 성향 이외에도, 타인과 교류하고 베풀고 희생하는 본성 또한 있다고 말한다. 다만 이 두 가지 특성 중 개인이 어느 성향에 가까워질지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 지금의 우리 사회 - 이 책은 1976년에 쓰였지만 2021년인 지금도 변함이 없다 - 는 소유하고자 하는 본성을 부각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소유적 인간이 존재적 인간보다 절대 다수인 것이다.
두 특성 모두 인간의 생존과 자아실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다만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커다란 문제를 가져온다.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가 소유적 실존양식만이 부각되고 긍정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유적 본능은 생존과 기술 발전 등에 있어서 필수적이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고 타인을 종속시키며 폭력을 반드시 동반하고 무엇보다도 그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해 종국에는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바꾸어 존재적 실존양식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해야 한다.
저자는 재미있게도 그 변화의 전제조건으로 불교의 사성제에 대해서 말한다.
나는 다음의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실제로 인간의 성격은 변화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 우리는 우리의 고통(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다.
- 우리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정한 행동규범을 가져야 하며 현재의 생활습관을 변화시켜야 함을 인식하고 있다.
위의 네 가지 요점은 인간의 보편적 실존조건에 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이루는 네 가지 숭고한 진리와 일치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리뷰에서는 쓰지 않겠다. 50년 전의 책이니 만큼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거나 지금의 정서와는 일치하지 않는 제안들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는 짧게 서술한 후 이 책의 후속편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의 기술>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 방법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의 내용에서 벗어나 사담을 해보자면, 나는 소유에서 존재로의 변화를 이끄는 데에 '공유경제'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빌리고 빌려주고 나눠 쓰는 행위를 통해 사용하기 위해서 소유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무제한적인 소유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인터넷과 여러 플랫폼이 생기고 발달하면서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최근 변화를 보면 반대의 방향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쉽다.
또한 블록체인 기술인 NFT (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한 토큰)로 인해 인터넷의 무형성에도 개인 소유의 개념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소유 지향적인 사회체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든다.
NFT가 도대체 뭐야? - MIT Technology Review
다만 최근 들어서 전 세계적으로 지구 평균 기온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처럼,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하나하나씩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긍정적인 기대를 해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변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