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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주 May 27. 2021

스토너 - 인간이라는 종의 편린

 존 윌리엄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의 등장인물인 나가사와는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저자 사후 30년 이상 지난 책’만 읽는다고.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강력한 힘을 버티고도 살아남은, 검증받은 책들만 읽는다,라고. <스토너>의 저자 존 윌리엄스가 이 책을 출판한지는 55년이 지났고, 저자가 죽은 지는 27년이 지났다. 나가사와의 기준에는 살짝 못 미칠 수 있지만, 충분히 검증받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시간의 힘을 버틴 방식은 조금 특별하다. 저자가 이 책을 출간하였을 때(1965년)는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저자가 죽은 (1994년) 후 2003년, 미국의 한 출판사가 책을 재발간하게 된다. 그때도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다 갑자기 네덜란드를 필두로 한 유럽에서 몇십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도 2015년에 출판이 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인기를 겪지 못했는데, 사후 인기를 얻게 된 소설에서는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점 때문일까? 내가 마케팅 전문가나 출판업계의 사람도 아니므로, 외적인 요소가 아닌 이 책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책은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간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1 세계대전과 2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근처에 대학교가 생기고, 농업기술을 익히고자 농대에 들어간다. 그런데 교양과목을 듣다가, 영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담당교수 말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것이다. 그렇게 영문학도의 길로 들어서 박사과정까지 밟고, 같은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은퇴하는 해에 죽는다. 대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기간에 대한 묘사는 매우 짧다. ,  책은 대학에서 시작되어 대학에서 끝난다.

객관적으로 봤을 , 스토너가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기 힘들다. 첫눈에 반한 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실패하고 평생 무관심하고 수동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딸을 낳게 되지만, 아내의 히스테리로 인해 딸도 고통을 받고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스토너는 나중에 가서는 거의 학교에서만 생활하게 된다. 딸은 결혼을 통해 집에서 도피하지만,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 스토너는 나이 40 다른 사랑을 만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어지지 못한다. 그가 딸과 아내를, 그리고 그것보다 연구를 하고 책을   있는 환경을 포기할  없기 때문에. 평생을 바친 일에서도 주목받을 만한 업적은 내지 못하고, 평생 조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이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책의  부분에서, 그의 삶을 요약하는 부분이 나온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을 중간까지 읽다가 덮는 사람이 많으리라. 요즘에 말하는 ‘사이다’ 같은 전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주인공은 대부분 상황에서 무감각하고, 무심하고, 초연하게 행동한다.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이런 주인공을 데리고는 흥미롭게 사건을 전개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글 또한 담백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재미 포인트는, 클라이맥스는 어디인가? 바로 마지막이다. 이 책은 1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7장이야 말로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답답했던 앞의 행보들은 바로 이 마지막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은 어떤 내용일까? 이언 매큐언이 이 책의 추천사를 이렇게 썼다. “스토너의 죽음에 대한 존 윌리엄스의 주관적인 묘사는 현대 문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바로 죽음이다. 스토너의 죽음. 객관적으로 보면 주인공은 계속해서 고통을 받는 삶을 살다가, 별다른 업적을 내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며,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친구가 있었지만  명은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명은 이제  멀리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뭐가 있지?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책을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 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여러 고난과 실패를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인생에 비하면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원한 것, 그가 마지막까지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의 영문학 연구였다. 그것이 역사에 남을 것인지,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영문학을 사랑했으며 그것을 평생 연구했다는 그 사실, 그것이 그에게 중요했다. 마지막 순간에, “넌 무엇을 기대했나?”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내렸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리고 자신이 영문학에 입문하게 된 그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대한 대답을.


<스토너> 끝까지  읽고, 책의 감동을 끝까지 즐기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 책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이런 책이란, ‘집요하고 완결성 있는책이다.  인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할 정도로 묘사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배경과 주변 인물까지. 주인공에게 이입되도록.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벅찬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책의 모든 내용, 구성, 시간대, 인물이 갈고 닦여  한순간을 빛낼 , 나는 감탄하고, 감동하고, 때로는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나는 것이다.

, 이런 책이란 ‘전형적인 인물 대한 책이다.  책은 1 세계대전과 2 세계대전이라는 굵직한  사건을 모두 겪은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사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중요하다. 시대적인 조류를 타는 소설이 있다.  시대에 유행하는,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소설은 그와는 다르게,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배경이 19세기 미국이든, 고대 인도든, 22세기 화성이든 이야기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물이기에. 나는 이러한 소설이 마음에 든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만년  지구에서 탄생해 이제 지구에 가장 넓게 분포한,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편린을   같은 느낌이 든다.

  가지,  ‘집요하고 완결성 있으며’, ‘전형적인 인물 대한 책이라는 점이  책이 50 지나 다시 조명받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윌리엄 스토너 영문학도가 되어 평생을 바치게  계기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번째 자아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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