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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양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_ 새로 그려나갈 헌 도화지

by 형준

무인양품 매장에 들어서면 심플한 디자인의 물건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특유의 아로마 오일향이 코를 감싼다. 가지런히 정리된 필기구. 하얀색 프레임에 회색화면의 전자시계. 낮은 명도와 로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의 옷가지들. 그리고 괜스레 편안해지는 마음과 전날 밤 메모해 두었던 머릿속 글귀들이 나를 반긴다. 매장에 입장하는 단 한 발자국 덕분에 온갖 생각과 불편함으로 휘몰아치던 마음속 소용돌이가 잠잠해진다. 우리 몸의 90%는 물이라지만, 그 순간만큼 내 몸의 구성물은 편안한 감정과 따뜻한 기분 그리고 약간의(?) 소유욕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전에는 그 무던함이 참으로 싫었더랬다.


무난함과 특이함 사이에서 특이함을, 편안함과 불편함 사이에서는 불편함을 골랐더랬다. 어릴 적부터 타인의 시선에 민감했던 나는 공부를 할 때도 옷을 고를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조차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흔들리는 컴퍼스 같은 사람이었다. 바닥에 콕하고 박혀 중심을 잡아줘야 할 끝부분이 불안정해 하얀 도화지 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연필 자국만이 남았다. 억지로 꾹꾹 누를수록 격해지는 컴퍼스의 움직임에 그 자국은 점점 선명해지고, 엉망이 됐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지우개로 박박 지우자 연필자국이 번지고 지우개 가루가 흩날려 도화지 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새로운 도화지를 꺼내볼까. 컴퍼스를 새 걸로 바꿔볼까.’ 고민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두 가지를 모두 바꿔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음속 여윳돈이 없어서 둘 다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지우개를 샀다. 도화지를 마주하고 끄트머리부터 천천히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하루에 조금씩. 시간이 날 때마다.

팔이 아파 힘이 들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다. 스쳐 지나간 인연들과 지금도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때로는 나 대신 엉망이 된 연필자국을 지워주었다. 지울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자국들이 지워지고 어느새 반대쪽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전, 꽉 차 있던 옷장과 신발장을 정리했다. 가격과 브랜드에 상관없이 손이 자주 가는 옷만 남겼다. 40만 원짜리 니트가 걸려있던 자리에는 49000원짜리 검정 무지색의 니트가, 20만 원짜리 바지가 걸려있던 자리에는 5만 원짜리 바지 두 장이 남았다. 중고거래로 팔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옷가지 한 벌에도 좋아해 주는 내 앞의 사람들이 또 한 번 지우개를 꺼내든다. 덕분에 통장도 마음도 두둑해졌다. 편안했다. 집 밖에 나설 때마다 했던 옷 조합에 대한 고민도, 과금을 지출하고 생활비에 허덕일 다음 달에 대한 걱정도, 무난함에 대한 두려움도 더 이상 내게는 없다.


어느새 마음속 여윳돈이 두둑해진 듯하다. 깨끗한 도화지를 살 돈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컴퍼스를 살 돈도 생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힘겹게 지워온 도화지 위 연필 자국이. 오랜 시간 막 다뤄 흔들리는 컴퍼스가. 왠지 모르게 버리고 싶지가 않다. 앞으로도 가끔 지우개만 사야겠다.



무인양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속 있는,

특이하지는 않지만 특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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