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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파친코>

책, 이민진

by 너무강력해

소재가 독특하다.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라서 그렇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다"라는 묘사처럼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재일조선인을 차별한 일본인과 다르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들이 조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쪽발이란 이름으로 차별하고 멸시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만약, 그들이 조선인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차별에 맞서며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열광하며 감동했을 것이다. 우리는 관심도 없었고 그들을 위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역겹다. 우리의 위선이.


작품은 선자라는 주인공의 가족을 통해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를 그리고 있다. 그렇다. 그런 이야기다. 다만, 여기서 시각을 살짝만 바꿔보자. 파친코는 어느 사회나 시대에나 존재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작중 일본인인 에츠코를 살펴보자. 모자수와 하루키의 평가에 의하면 그녀는 훌륭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는 유부녀였지만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고향을 떠나게 된다. 불륜은 사회적 다수가 정한 룰을 어긴 죄이다. 마치 "넌 우리 집단의 규범이나 다수가 정한 규칙을 어겼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결국 에츠코는 사회적 소수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식들까지 고통받게 된다. 죄라면 부모의 죄인데도 왜 자식들까지 죄인의 자식들로 낙인찍고 괴롭히는가. 어긋난다. 그녀의 아이들은 어긋나고 만다. 특히 그녀의 딸 하나는 엄마를 이기적이라며 비난하고 접대부가 되어버린다. 병에 걸린다. 죽고 만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독립된 객체이다. 한데 왜. 죄까지 물려받아야 하나.

선자의 아들 노아는 어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다수인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받는다. 노력한다. 아버지 이삭의 바람대로 정직하고 착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는 지친다. 결국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노아에겐 어떤 잘못이 있었는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뿐이다. 그의 출신은 숙명적인 것으로 그가 통제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하나와 노아, 그녀와 그의 잘못은 없다. 있다면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작가가 인간의 삶을 파친코라는 슬롯머신 도박장에 비유한 점이 인상적이다. 인간의 삶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는 묘사처럼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기는 건 인간이지만 이후의 과정과 결과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는 작가의 냉정한 현실 인식이 엿보인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길 바라며 행동하지만 지나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다. 주인공 선자의 선택들은 어땠나. 고한수와의 사랑을 선택했지만 실패했고 이삭과의 오사카행을 받아들인다. 요셉의 빚을 갚기 위해 팔게 되는 회중시계로 인해 고한수와 다시 엮인다. 노아의 등록금을 위해 고한수를 다시 찾아가는 선택, 잠적한 노아를 찾아가는 선택들이 노아를 다시 어렵게 만든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다독였지만 결과적으론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선택이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삶은 고단하지만 게임은 계속해야지" "삶은 엿 같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냐"라는 모자수의 말처럼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겨야만 한다. 두려운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라도. 우리는 약간의 슬픔과 약간의 기쁨을 가지고 묵묵히 걸어가야만 한다. 선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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