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김은숙
"혹시 아오, 그날 밤 내가 귀하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날씨는 화창했고 잔잔한 수면 위로 연인처럼 잘 어울리는 두 남녀가 나룻배를 타고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노를 젓는 사내를 동지로 오해하고 하는 대사이다. 내 인생 드라마이며 천재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인생에서 정점을 찍은 작품, 미스터 선샤인. 구한 말 격변하던 조선을 배경으로 불꽃처럼 뜨겁게 살고자 했던 한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한 사내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많은 명대사와 명장면으로 그려냈다.
고애신: 조선 최고 사대부 댁 영애이자 조선판 총을 든 여전사. 고집 세고 당돌하며 호기심 많은 성격에 꺾이지 않는 마음과 주체적 인생을 장착한 불꽃으로 살고 있는 애기씨. 고애신이 조선을 상징한다고 보면 고애신을 돕거나 사랑하면 다 의병이라 볼 수 있다. 세 남자의 애신을 향한 미친 사랑도 이해된다. 미션은 의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유진과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나 워낙 유명인이자 시대 때문에 숨어서 만나거나 꿈에서 그리워해야 하는 불편한 연애를 한다. 애신은 유신을 만나 자신이 왜 조선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애기씨만 보면 가슴이 아려오고 김태리 인생 최고의 배역이 아닌가 한다. 애기씨=김태리 공식이 성립되었으니.
애기씨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잘 표현한 명대사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요. (생략)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
지려 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나는 그리 선택했소."
최유진: 사랑의 바보. 모시던 상전에게 부모가 매 맞아 죽은 이후 살기 위해 도망친 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미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후 군인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부모의 원수인 조선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애신을 만난 이후 흔들린다. 장르에 분명 멜로가 있는데도 키스신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키스신 빼고는 연인 사이와 같다. 만남, 통성명, 악수, 포옹, 그리움, 드라이브, 연애편지, 바다 구경, 낚시, 청혼, 혼인, 반지, 부부 사진, 하룻밤, 이별, 재회, 사별 다 나온다. 총을 주무기로 사용해서 그런지 총 맞아 죽는다.
자신의 인생이 망해도 불꽃을 사랑하겠다는 유진의 절절한 마음이 잘 표현된 명대사
"다 왔다 생각했는데, 더 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꽃 속으로 한걸음 더"
구동매: 사랑의 등신. 백정 출신이자 어린 시절 애신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동경하는 대상으로 애신을 대하는데, 자신의 가까운 여인들에게는 다정다감하지만 애신에게만은 쌀쌀맞고 거칠게 대한다. 아무래도 가질 수 없는 대상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애신이 자신을 기억해 줄 것이라는 본능적인 부분이 있는듯하다. 결국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이라는 거친 말이 구동매가 애신의 인생의 조금이라도 가지게 해줬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동매와 애신이 마지막으로 만나서 나누는 그 대사 "애기씨 이제 날아오르십시오"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마지막으로 응원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고 드라마의 마지막이 다가옴이 느껴서 서글퍼졌다. 유진의 "당신의 승리를 빌며" 랑 비슷한 대사. 양화와 서로 좋아하지만 둘이 좋아하는 걸 둘만 모르는 커플. 칼을 주무기로 써서 그런지 칼 맞아 죽는다.
가질 수 없는 여인을 향한 마지막 응원
"애기씨 이제 날아오르십시오"
김희성: 사랑의 쪼다. "...물론 내가 가는 그 길엔 꽃은 피어있지 않겠지만..." 이 대사를 가져온 이유는 희성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전부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건 없거나 가질 수 없는 텅 빈 인생. 조부의 악행으로 어려서부터 주의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눈총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고 성인이 되어 도망치듯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조부는 이미지 세탁을 위해 평판이 좋은 고사홍 집안과 혼인을 맺지만 희성은 일본에서 차일피일 귀국을 미룬다. 버티다 귀국해서 대충 정혼자를 보러 갔는데... 그만 애신에게 한눈에 반하게 되지만 이미 늦은 상황. 원래 자신의 것이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슬픈 인생의 소유자 김희성. 애신이 초기에는 신분제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희성은 애초에 그런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백정 출신 동매와 노비 출신 유진에게 먼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다. 유진의 아비가 몽둥이 맞아 죽어서 그런가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그의 죽음과 함께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회중시계 소리도 멈춘다.
희성이 애신을 슬픈 과거가 되었음을 받아들이는 명대사
"믿소, 그대가 한때 내 진심이었으니까"
이양화: 친일파 이완익의 딸. 글로리 호텔의 주인이자 작품 속 신 스틸러다. 김민정이라는 배우의 미모도 뛰어나지만 뭔가 조연인데 주연 이상급의 존재감을 뽐낸다. 작품 속에서는 부족함 없이 잘 사는 것 같지만 이면에는 슬픔이 보인다. 유진을 잠깐 마음에 들이지만 결국 동매을 좋아한다. 동매를 기다리지만 동매는 보름만 기다린다. "오직 고애신만을 사랑해서, 사랑에 미친, 사랑해서 미친 그런 사내를, 난 기다렸지" 안타까운 순애보. 자신의 호텔이 일본군 숙소로 이용되자 호텔을 폭파시키는 걸크러쉬를 보여주고 의병이 된다. 동매의 등에서 죽음을 맞는다.
양화의 동매를 향한 안타까운 순애보를 보여주는 명대사
"오직 고애신만을 사랑해서, 사랑에 미친, 사랑해서 미친 그런 사내를, 난 기다렸지"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에 대한 감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숙이라는 천재에 대한 찬사와 이런 명작 드라마를 만들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굿바이 미스터 션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