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린 시절 아끼던 보물 리스트에는 추리소설 몇 권이 있었는데 그것들 중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가장 애정했다. 해냄 출판사에서 출판한 양장본으로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표지에는 호박 그림이 그려져 있고 속표지에는 어마어마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스포 때문에 차마 그 문장을 옮길 수는 없지만 어린 나를 추리기로 입문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지금이야 추리에 빠져있던 시간들이 후회스럽기는 하지만 그 시절 내 생의 일부분이니 추억이긴 하다.
보물이었으니 소중히 간직했을 것 같지만, 당시 친구들에게 떠벌리기 좋아했던 난 친구들에게 그 보물을 대여하기 시작했고 이내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나와 달리 지금은 기억도 가물거리는 친구들에게는 그 책은 딱히 소중한 물건이 아니었고 이내 관심에서 멀어졌으리라.
당시 책을 되찾기 위해 탐문 수사로 추적했지만 획득에는 결국 실패했다. 한동안 절망감에 우울한 나날이긴 했지만 그 덕분에 얻은 것도 있었다. 쓰라린 경험은 이후 자신의 물건을 수시로 점검하는 다소 귀찮은 습관으로 발전하여 개인 소지품을 분실하는 불상사는 막아주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이 잠시 나를 과거로 데려가는 바람에 잠시 끄적여 보았다.
한데 보통 영화에서는 남녀가 도서관 책장 사이로 눈이 마주치던데 현실은 영화 같지 않더라는. 내가 너무 올드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