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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근희 Jun 01. 2016

반려견에 대해 "생각"하다

이심전심. 존재와 존재를 연결할 수 있는 단어


작년 10월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동생이 닥스훈트 한 마리를 분양해왔다. 분양인지 납치인지 갈취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미개의 눈물 어린 호소문이나 협박 전화가 없는 것으로 봐서는 어느 정도 서로 간에 타협이 있었지 않았을까.


아니. 생각해보면 이 쪼꼬만 한 녀석이 우리 집에 들어온(이라 쓰고 위장전입이라 읽는다) 사건은 아주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을지도. 이 녀석은 동생 방으로 들어가는 인터넷 선을 끊어먹었고 이제는 치지 않아서 형광등을 갈거나 통기타를 뜯을 때나 사용하던 내 피아노 의자 다리를 물어뜯어 뼈대 (의자에도 뼈가 있다면)만 남겨놓았다. 또한 내 방바닥의 장판을 물어뜯어놓았으며 동생의 안경을 꺼내 한쪽 알을 빼내어 냠냠 씹어드셨으며 올여름의 모기들을 막아줄 유일한 창문에 달려있던 방충망에 크나큰 구멍을 만들어주었고 어마마마의 방에 상습적으로 침입하여 이불에 자신의 먹은 것을 친히 확인시켜주기도 하였다.  



2개월에 데려와 어느덧 8개월이 지났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몰랐는데 녀석은 그렇게 어느덧 닥스훈트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나.  집안에 강아지를 들여놓기 시작하면서부터 반려견이란 명칭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참 많이 있었다.   


문자적으로 받아 이해한 지식이 있었는데 개들은 사람만큼의 근육이 얼굴에 없어서 표정을 짓지 못한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는데 같이 마주하며 살아가다 보니 또 전혀 아니더라. 이 녀석도 표정이란 게 있어서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고 외로운지 심심한지, 또는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하는지 표정을 보고 알 수 있겠더라.  

이심전심이란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더라구.



그 단어는 마치 사랑하는 존재들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정말 적합한 단어랄까.  이 녀석도 생각이 있고 기분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 가혹하게 동물들을 다룰 순 없을 텐데 말이지. 다른 존재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냉혹하다.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무엇을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많은 말썽을 피우고 혼도 많이 나지만 그래도 참 이쁜 건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시선은 내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개껌을 먹을 때도 나를 바라보며 먹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도 나를 신경 쓰고 놀다 재미가 없어지면 자기 집에 앉아서 조용히 내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신나는 표정, 혹은 갸우뚱 거리는 표정과 함께 흔들리는 꼬리.  어떠한 존재에게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평생을 함께 한다는 표현의 "반려"라는 의미를 부여해 그 존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혼이 나도 꼬리를 흔들며 파고들고 잠이 오면 침대에 올라와 이불속으로 들어와 꼭 내 몸에 자기의 몸을 붙이고 잠에 들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깨서 몸을 붙이는 그러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이 차갑고 차가운 세상에서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자 하는 작은 몸짓. 그 몸짓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더라.


이토록 작은 존재가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 세상은 문자로 점철된 삭막한 단어나 개념, 얕은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을 이해한 척 하지만 실상은 내 옆에 있는 작고도 놀라운 생명 하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 사진은 서비스! 폰으로 찍은거라 그런가 좀 아쉽지만서도 :D



반려견. 그것은
허무주의와 무애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세상으로부터의 사랑이 아닐까. 


사랑하라, 사랑하라.  값없이 사랑할 수 있노라.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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