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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Dec 30. 2021

폼페이 최후의 날, 카를 브률로프

러시아 음악하면 차이콥스키 아냐? 근데 러시아 미술은... 잘 모르겠어.

러시아 미술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러시아 문학하고 음악은 한국에서도 유명하잖아? 소설하면 톨스토이하고 도스토옙스키 딱 떠오르고. 음악하면 차이콥스키 아냐? 근데 러시아 미술은... 잘 모르겠어."

아마 러시아 그림 중에 뛰어난 작품이 없어서 그럴거야 라고 생각하기 쉽죠. 러시아 미술은 서양 미술에서는 어느 정도 소외된 게 사실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에 러시아 미술이 잘 소개되지 않는 점도 작용하죠. 하지만, 러시아 미술이 형편없어서는 절대 아닙니다. 뛰어난 작품이 많을 뿐 더러, 19세기 사실주의 미술은 작품 규모도 어마 어마 하거든요. 학이여인루시는 베일에 가려진 러시아 미술을 소개하기 위해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러시아 최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화가 브률로프를 소개합니다.


표트르 대제의 영재육성정책 덕분에 화가 지망생 이반 니키틴은 이탈리아 그림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유학 후 그가 황실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바로크 미술이 처음 러시아에 들어 오게 되죠.


그후 100여년이 지나 비로소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화가가 등장합니다. 러시아 낭만주의 화가 브률로프입니다. 브률로프는 활동 당시 이미 유명했습니다. 러시아에서 그의 명성은 루벤스나 렘브란트와 동일선상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카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러시아 황립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3년간 이탈리아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아주 빠른 시일 내에 훌륭한 화가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쉽게 학과 과정을 이수했으며, 시험 기간에 다른 학생들을 도와 줄 정도로 뛰어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카를 브률로프 1799~1852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후 이집트 유물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고대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습니다. 유럽의 사학계와 예술계에서는 열심히 고대와 고전 시대를 연구하고 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률로프가 폼페이를 주제로 한 것은 서양미술사의 관점에서, 러시아 미술이 주류에 발을 내딛는 적절한 선택이었죠. 이 그림은 서양 역사화의 전형인 아카데미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것, 르네상스 대표 화가 미켈란젤로의 조각 같은 인체 표현, 연극적인 연출 등은 아카데미즘 방식이죠.

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 1867~1868 장 레옹 제롬


폼페이는 AD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시입니다. 수천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죽어가던 그들의 형태는 화산재에 의해 보존되어 지금껏 생생히 고통을 전하고 있습니다. 브률로프는 오랫동안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폼페이 현장을 몇번이나 찾아가 일일이 스케치 하며 거리의 모습을 담았다고 합니다. 뜨거운 화산재 속에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 하였습니다. 그림 속 몇몇 인물들이 화가가 실제로 봤던 그 포즈대로 그려졌습니다. 자료 화면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마차에서 떨어져 누워 있는 엄마와 아기, 젊은 커플 등이 실제 모델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그림의 구체적인 무대로 '죽은 이들의 거리'로 불리는, 헤라클레스의 문에서 빌라 디오메데스에 이르는 구간을 택했습니다. 이 작품은 1833년 밀라노에서 전시되어 격찬을 받았습니다. 1834년 파리 살롱전에서 1등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브률로프의 명성이 러시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작품입니다. 화가는 인간 문명이 파괴되는 비극 속에 빠져 일하다가 거의 반 기절한 채로 작업실을 나오곤 했답니다.

폼페이 화산재 속에서 발견된 사망자들의 형태


그림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화산 폭발이 가져온 재앙의 순간을 브률로프는 매우 연극적인 방식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배경과 등장인물은 최대한 현장에 근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난을 맞닥뜨린 다양한 인간상을 담아내기 위해 화가가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죠. 파국을 강조하기 위하여 X자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그 덕분에 어지러운 장면들이 잘 정돈되었습니다. X자의 윗 공간은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암운이 도시 전체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좌우에는 재난 앞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군중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공간은 연극 무대의 스포트 라이트처럼 밝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림의 결론을 위해 연출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숨져 있는 어머니는 지나간 세대를, 살아 있는 아기는 앞으로 올 세대를 상징합니다. 일종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것인데요, 이 메시지는 또 다른 인물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좌측에 십자가를 목에 걸고 횃불을 들고 있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마치 노인에게 목숨을 위탁하는 듯한 어머니와 딸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를 말하고, 횃불은 유일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기독교가 불법 종교였음을 감안할 때, 종교적 상징을 드러내 놓고 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노인은 초대 기독교의 사도나 장로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부숴져 내리는 로마 신상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폼페이의 재앙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우상을 숭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뜻일까요? 그리고 캔버스에는 브률로프 작품에 등장하곤 했던 율리야 사모일로바 백작 부인이 3번이나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있는 여자, 부서진 마차에서 떨어져 살아 있는 아기 옆에 죽은 어미, 그리고 왼쪽에 자기 딸들을 지키는 어미입니다.

율리야 사모일로바 초상 1842 카를 브률로프 러시아박물관


그림을 처음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른쪽 위의 화산 폭발 장면이나 쓰러지는 신상에 촛점을 맞추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난삽해 보이는 이 그림을 물 흐르듯이 감상할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신상 밑에는 백마 탄 남자가 있습니다. 그 남자의 발은 신혼 부부에게로, 신혼부부의 다리와 팔은 쓰러진 아버지와 아들에게로, 그들은 폼페이 총독을 이고 가는 군병과 시종에게로, 총독의 발은 쓰러져 죽은 여인과 아기에게로, 죽은 여인의 팔은 도망치는 네 가족에게로, 네 가족은 신전에서 값비싼 것을 훔쳐 나오는 사람들에게로, 그들은 결국 횃불을 든 노인에게서 완결이 됩니다. 인물들의 손과 발을 따라 가면 인접한 인물들로 동선이 이어져 전체를 아우르게 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한 사람씩 따라 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성격을 차근 차근 살펴 보라는 의도입니다. 그림에는 고전주의의 특징인 영웅이 없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뜻이죠. 재난 앞에선 다양한 인간 군상!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백마 탄 영웅 같은 존재도, 신혼 부부도, 효자 아들과 아버지도,  폼페이를 다스리는 총독도, 엄마와 아기도 자연 재해 앞에서는 모두 무기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은 러시아 미술사에 새로운 경향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영웅 중심의 미술이 민중 중심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이는 18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 이후,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 지성인들의 사상을 화가가 이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 1833 카를 브률로프 러시아 박물관


그림에서 화가는 익살을 부렸습니다. 자신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한번 찾아 보시겠습니까? 화가라는 점이 힌트입니다. 왼쪽 계단 위에 몰린 군중 중에서 화구를 머리에 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찾으셨나요? 화가가 그림에 자신을 집어 넣는 것은 재난의 순간을 함께 하며 고통을 나누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저 먼 고대 타국인들의 고통을 보편적인 인간의 성정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화가는 왜 보물을 훔쳐 나오는 사람들 속에 자신을 배치했을까요? 이들은 곧 죽을지도 모르고 탐욕에 눈이 어두운 저급한 인간들을 뜻하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자신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는 뜻일테죠. 단, 그의 보물은 화구입니다. 화가는 아마 이렇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최후의 날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림을 버리지 않으리라!

화구를 이고 있는 화가


이 글은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h46p-U-ZX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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