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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Jan 12. 2022

18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서양사적 의미

1812년의 아이들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18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참여했던 젊은 귀족들을 1812년의 아이들이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일까요? 1812년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해입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여 프랑스로 퇴각합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한 젊은 러시아 귀족들은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많은 유럽의 군인, 귀족들을 만나며 오히려 러시아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죠. 요즘 말로 현타가 온 겁니다.


종횡무진 역사의 저자 남경태 선생은 러시아와 동양에 없는 것이 ‘시민사회’라고 말합니다. 서양사는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발전을 이룩하게 된 반면, 서양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던 동양이 망한 것은 바로 그 시민사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영국 청교도혁명을 승리로 이끈 의회파는 1649년 국왕 찰스 1세를 참수합니다. 이후 영국은 왕정복고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죠. 이후 왕은 상징적은 존재로 남고, 정치는 의원들이 하는 ‘입헌군주제’로 전환됩니다. 영국은 시민의 정치 참여가 보장된 가운데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어, 이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번영을 구가하게 됩니다.

영국 명예혁명이 있은지 100년 만에 드디어 대륙에서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혁명보다 프랑스 혁명이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생함으로써, 유럽 대륙에 미친 영향력이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가 결렬되면서, 시민혁명이 촉발되었습니다. 물론 프랑스혁명은 1789년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 코뮌까지 이어지죠. 이러한 일련의 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은 시민의 권리를 확대, 보장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발전해 나갔습니다.

유럽의 심장부에서 러시아 젊은 귀족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러시아도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1825년 12월 14일(현, 12월 26일)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데카브리스트 봉기의 과정

타간로그로 휴양을 떠난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 11월 19일(현, 12월 1일) 급사합니다. 황제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죠. 러시아군과 국민들은 당연히 알렉산드르의 바로 아래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장교들과 근위대도 콘스탄틴에게 충성서약을 합니다. 그들은 대공이 러시아 제국의 왕위를 거절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콘스탄틴은 자신을 향한 근위대의 충성 서약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왕위를 동생 니콜라이에게 양보합니다. 콘스탄틴은 폴란드 왕국의 통치자라는 점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귀천상혼이어서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결격 사유가 있었죠.

콘스탄틴은 러시아 귀국도 거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 왕이 없는 날이 지속되었습니다. 국민들은 불안해 했습니다. 니콜라이는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새 황제 추대식을 12월 14일(현, 12월 26일)에 거행하기로 공표하였습니다. 아직 누가 황제 자리를 이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근위대는 이미 콘스탄틴에게 충성 맹세를 한 상태라서 상황은 미묘하게 돌아갔습니다. 비밀결사 지도자들이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작정합니다. 이 때가 아니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이들은 니콜라이가 불법적으로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이 혁명가들을 나중에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는 러시아어로 12월을 뜻하는 데카브리(Декабр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들의 혁명이 12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진보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자유민 계층의 대표자들로 회의를 구성하고, 이 회의에서 국가 통치 형태를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였습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농노제 폐지와 더불어,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정치 경제의 자유를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전제정치를 끝장내고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혁명가들은 근위대의 지지를 등에 업고 거사를 계획했습니다. 거사일이 다가올수록 조직은 두려움에 분열되기 시작했지만 거사를 늦출 수는 없었죠. 12월 14일(현, 12월 26일), 오후 2시 30분쯤 원로원 광장에는 3천여 명의 혁명군이 도열해 있었고, 1만 2천 명의 총검을 찬 보병과 기병이 이들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혁명군과 니콜라이의 군대는 오랜 시간 대치하였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 그들은 서로 지쳐 갔습니다. 니콜라이는 사격 명령을 2번이나 내렸다가 번복하였지만, 결국 사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총격이 시작되자, 혁명군 대형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혁명군 병사들과 수병들은 네바 강변을 따라 도주하거나, 심지어 얼어 붙은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빠져 죽는 자들도 수두룩했습니다. 혁명군은 힘 한번 크게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후 6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봉기에 가담한 혁명가 120여명이 유형과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주동자로 밝혀진 파벨 페스텔, 콘드라티이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아포스톨, 미하일 베스투제프-류민 그리고 원로원 광장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사령관이자 주지사인 밀로라도비치에게 치명상을 입힌 표트르 카홉스키 다섯 사람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혁명 실패의 여파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러시아는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게 됩니다. 시민사회의 출현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알렉산드르 2세가 등장하여 황제 스스로 농노제를 폐지하는 등 획기적인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지만, 1881년 황제가 인민의 의지 당원들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개혁은 좌초하게 되죠. 시민사회가 등장하기도 전인 1917년, 레닌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는 불완전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잠시 빛났던 소련 시대는 1991년 연방 해체와 함께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은 러시아가 유럽과 같은 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우리가 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어두운 시선도 많이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공산당 독재와 스탈린 대숙청과 같은 인권 유린과 암흑의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활기차고, 번영된 민주 국가를 이루고 있을지 모르죠. 1812년 아이들의 꿈은 처참히 깨어져 버렸지만, 그들의 개혁사상까지 러시아에서 없애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데카브리스트들이 남긴 씨앗은 이후 러시아의 사상가, 문학가, 화가들의 가슴 속에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 글은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I1UFtF4ug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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