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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Aug 19. 2024

[職四] 곡기를 끊을 줄 아는 자의 여유

직장인의 사계 - 겨울(삶에 단식을 들여 더 충만해지다)


곡기를 끊다.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아니하다. 여기서 '곡기()'는 곡식으로 만든 음식입니다.


    곡기를 끊는다는 건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않는 것이지요. 즉 자의와 타의를 모두 포함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정말 먹을 게 없어서 곡기를 끊는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이겠지만 여기서는 자발적인 곡기 끊기, 즉 '단식(斷食 : 일정 기간 동안 의식적으로 음식을 먹지 아니함)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볼까 합니다. 


    먹고살려고 일을 하고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뜬금없이 들릴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단식을 합니다. 그냥 굶습니다. 뭐 다양한 종류의 요란한 단식이 있는데, 저는 그냥 물만 마시며 굶습니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찾아 먹지 않습니다. 위장에게 휴식을 주고, 정신에 고요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지요. 속이 비어 있을 때 제 뇌는 훨씬 활발히 활동하고 몸도 기민하게 움직입니다. 굶은 사자와 배부른 사자 중에 누가 더 사냥을 잘할지는 굳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늘어나는 뱃살을 관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가, 숙면을 위하여, 편안한 속을 위하여를 넘어 정신적 승리를 위하여 주기적으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기 위한 필수 스킬이니 습관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입니다.




    그래서 단식을 삶의 한 부분으로 들여놓았습니다.  

    단식으로 몸만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제 맘, 궁극적으로 삶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제 밥줄을 쥐고 흔들어도 제가 '굶을 권리'까지는 그들이 빼앗을 수 없으니까요. 




    이 생각이 제 중심에 있는 한 누구도 쉽사리 저를 흔들어대지 못합니다. 먹지 않음을 통해 좀 더 잘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역설이 여기에 있지요. 먹고 안 먹고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진심이 깃든 의미가 필요합니다. 빵만 흔들어 댄다고 해서 쉽사리 움직이지 않으니 말이지요. 


    저는 직장에서 근무하며 이 의미를 찾으려 살아갑니다.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일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저의 루틴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며, 제가 힘겨워하는 이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느 날 그 의미가 퇴색되고 도저히 저 자신을 송두리째 망치지 않고는 조직에 머물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잠시 먹는 걸 멈추면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곡기를 기꺼이 끊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제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인내를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가벼워지는 이 기분을 저는 상쾌함이라 부릅니다. 언제나처럼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래도 전 많은 분들이 삶에 단식을 들여 이 충만한 비워냄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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