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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Jun 17. 2024

[職四] 배움으로써의 일

직장인의 사계 - 봄(월급 받으며 삶을 배우는 직장인)

    일을 하다 보면 갑작스레 상위 부서나 윗분의 요청으로 긴급하게 자료를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나 사업부의 기획 업무를 맡고 있는 팀에 근무하다 보니 회사의 기획팀, 혹은 그룹에서 요청한 자료 대응 등의 돌발적인 업무가 꽤 잦은 빈도로 주어 집니다. 초기에 이런 요청을 받았을 때는 '귀찮은 자료를 또 요청하는구나. 얼마 전에 제출한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또 난리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실제로 현장에 대해 뭣도 모르는 XX가 생각 없이 요청한 자료 같기도 했고, 그래서 더욱 쓸데없는 짓에 또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에 화가 나기도 했었습니다. 


    최근에도 저 위쪽의 지시로 급히 자료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거의 2주일을 팀원과 함께 작성하고 정리하고 수정하며 어렵사리 2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완성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여러 페이지의 나열식 보고서보다 정제하고 정제해서 태어난 짧은 보고문서가 훨씬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종이 2장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일면 허망하기도 하고 일면 뿌듯하기도 한 두 감정이 교차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에휴 또 하나 쳐냈구나. 징글징글하다'라고 느꼈을 텐데 제 머리가 커진 건지 상황이 바뀐 건지 모르겠지만 마냥 헛되다는 느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 요상 야릇한 기분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급하게 정제한 보고서이지만, 그 보고서를 위한 자료들, 즉 현 상황에 대한 팩트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통해 인사이트를 찾아 보고서에 녹여내는 일 자체를 제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여러 유관부서와 협의하고 확인하다 보니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요청자료 대응의 이점을 찾아냈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파악하셨겠지만 일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버겁고, 스트레스받고, 짜증 났던 일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 즉 태도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참 꼴 보기 싫던 일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 자체를 순수한 배움의 장, 성장의 기회로 삼았더니 그다지 유쾌하지 않던 일에서 좋은 향이 나는 향주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 여겨야겠지요. 그저 투정만 하다 이 한 많은 직장생활을 하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더 낮추고 겸손해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꼴 보기 싫던 일에서도 배울 점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들에게서는 어떻겠습니까?  오늘은 주변 사람들을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고 분명 모든 사람들이 맑은 향이 나는 향주머니를 꽁꽁 숨겨 놓고 있을 터이니 코를 킁킁 거리며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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