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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Apr 15. 2024

[職人] 무한신뢰 정상무님

직장에서 만난 사람 - 1. 정상무님 (첫사랑 팀장님)

  제 직장생활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분은 10년여를 다녔던 회사의 팀장님이셨습니다. 첫 회사에 입사했다 신검결과로 불합격하고, 치료를 받고 다시 입사한 회사가 1년여 만에 파산하고 난 뒤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정말 열심히도 살았던 그 시절을 만들어 주신 장본인이십니다.


  우선 이 분은 그 당시 회사의 주류였던 상위 몇 개 대학 출신은 아니셨습니다. 점수로 줄 세워진 기준으로 소위 상위 2~3개 대학이 주류였던 그룹이었기에 연줄로는 잘 나가기 쉽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호감형의 얼굴이지만 고민하실 때는 날카로운 얼굴이 나오기도 하셨구요.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지만 때로는 엄하게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낚시를 좋아하셔서 사원 시절 다 같이 견지낚시도 갔었고 배낚시도 간 적이 있었네요. 배 위에서 통째로 뜯어먹던 갑오징어 회의 그 달콤한 맛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소주 한 병을 옆에 차고 연신 올라오는 술안주를 생글생글 웃으며 맞았던 행복한 순간이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생생하네요. 


  그분의 리더십의 최고봉인 일화를 하나 소개해 드려야겠습니다. 


  그 당시 내수 영업을 담당했던 지라 인천, 안산의 공단으로 외근이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날도 안산의 중소기업인 고객사의 구매팀장님과 열심히 상담을 하고 들어와서 팀장님께 사안을 보고 드렸습니다. 그 고객사가 옥상에 자그마한 골프 연습장을 지으려는데 그래도 향후 영업을 위해 지원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안건이었습니다. 금액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소 무리한 요구이기는 했습니다. 철없던 저는 팀장님께 꼭 지원해야 한다며 열을 올려 설명을 했습니다. 혹여라도 알았다고 하시고 나중에 마음을 바꾸실까 봐 열심히 품의서까지 작성하여 들고 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분이 명장이신 이유가 증명되는 것이.


  "오케이, 네가 한다면 무조건 오케이다. 네가 허튼짓할 사람도 아니고 뭐든 못 해 주겠냐. 열심히 만들어서 그 업체 물량 다 가져와라"


  저는 품의를 득하고 바로 고객사에 전화를 해서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누군가가 나를 전적으로 믿어준다는 느낌이 주는, 속된 말로 '뽕 맞은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후로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성과도 좋았고 인사고과도 아주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팀장님이 다른 팀으로 옮겨 가시게 되셔서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를 가질 때 팀장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모든 팀원을 전적으로 믿는다. 보통 10명을 믿어주면 8명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다. 나머지 2명 정도가 내 기대를 배신하지. 그런데 그 둘은 원래도 보통 사람의 반 정도의 일 밖에 못하는 사람이니 크게 상관없다. 중요한 건 열심히 뛰는 8명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좋은 기운을 받아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면 그 합은 10명이 대충 할 때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직원들은 회사의 중추적인 인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내 일이라 생각하고 진심으로 일을 대하기 때문이다"


  잠시 멍해졌습니다. 사실 저만 믿어 주시는 줄 알며 짝사랑을 했던 제게 그분의 지지는 사랑이라기보다 박애에 가까운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래도 배신자 2명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제 직장인 DNA에는 짬밥 안 되던 어린 시절 배웠던 좋은 습관들이 남아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보통 누군가가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는 그 사람이 쓴 품의서의 수를 보면 된다고 합니다. 일상적인 품의서 말고 현실의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인사이트를 가지고 방향을 제시하는 품의서를 자주 쓰는 사람이 결국 빨리 배우고 더 많이 성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철없던 어린 시절에 고민하고 방향을 잡는 생각의 틀을 잡아주신 정상무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물론 그분의 그런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직하신 선배분들도 있었습니다. 모든 이에게 통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분명 '무한신뢰'는 조직을 움직이는 커다란 에너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제가 팀장이 되어 저희 팀원들을 믿어 줍니다. 


  다소 엉뚱한 소리를 해도 '어떤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다 보니 조금의 룸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엉뚱한 소리에 바로 '뭔 소리야'라고 반응하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소통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조금 지나고 보면 그 친구의 엉뚱한 소리가 꽤나 이유 있는 소리였음을 알게 되는 케이스들을 몇 번 겪고 나니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편안하게 신뢰를 보내 줍니다. 그리고 늘 얘기합니다. 뒤에 항상 내가 있으니 부조리한 것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편안하게 얘기하고 같이 바꿔 가자고 말이죠.


  팀원들과의 면담을 앞둔 금주에 정상무님이 주신 유산을 십분 활용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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