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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y 20. 2024

[職四] 나를 흔들어대는 가족

직장인의 사계 - 겨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저희 집에는 저를 포함 아내와 아들 둘이 서식합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큰 아이와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가 그 두 분입니다. 예전에도 말을 참 안 듣는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는데 특히 큰 아이는 도를 넘어서는 것 같아 아내와 저 모두 힘이 듭니다. 회사에서도 일이 한참 많고 정신없는 와중에 분에 못 이긴 큰 아이의 전화를 받고 진정시키다 보면, 회의에 참석할 시간이 되어 그렇게 서둘러 전화를 끊곤 합니다. 더 들어주고 보듬어 주고 싶지만 제겐 일하는 동안 그리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저는 조용한 게 좋습니다. 젊을 때야 헤비메탈 음악도 듣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음악을 들었던 것도, 그 시끄러운 음악을 껐을 때의 그 고요한 울림을 원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산에 오르던 길목에 자리한 조용한 산사에서 느꼈던 그윽한 향내와 시원한 바람 따라 울리는 풍경소리, 법당의 차갑고도 고요한 그 울림을 떠올리면 저는 늘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소요사태가 제겐 정말로 큰 시련입니다. 


  두 분의 사이가 안 좋아져 모두 다 같이 살기는 틀렸으니 갈라서서 살아 보자는 얘기까지 오고 갈 정도이니 이제 정말 막장인 것 같습니다. 제가 나서야겠지요. 

  아무리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져도 가족이 무작정 따로 사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둘째는 또 무슨 죄인지요. 요즘이야 대면대면 하지만 그래도 퇴근하면 달려와 품에 안기는 곰인형 같은 둘째분은 이 아수라장 속에서 늘 마음 조리고 있을 것 같아 미안합니다. 


  그래도 전 길을 찾을 겁니다. 가정만이 아닌, 결국 세상에도 그게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하며 나아갈 겁니다. 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산속으로, 혹은 무인도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아니라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니 그 역할도 어쨌든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제가 저희 부모님에게 받은 만큼은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하고자 하는 겁니다. 저는 사실 두 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의사를 존중해 주셨고, 지켜 봐 주셔서 그나마 제가 사람구실 하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제 어린 시절의 기억엔 아버지와 보리밭 길을 걸었던 기억, 산 정상에서 버너로 밥 해 먹던 기억, 입에 솔잎 물고 산을 오르던 좋은 기억이 많습니다. 온갖 푸르른 그곳들을 아버지의 든든한 등을 바라보며 해맑은 웃음으로 걷곤 했던 행복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무런 걱정도 없고, 아버지가 사주신 과자 한 봉다리와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을 가지고 오르던 그 산길. 뱀을 만나 놀라기도 하고, 매미 잡고, 메뚜기 잡던 그 시절의 따뜻한 기억들. 


  제게 아버지는 그런 든든한 울타리이자 좋은 가이드셨습니다. 몸소 실천하신 깨끗한 삶에서, 비록 사업이 잘 되지 않아 힘드신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으시고 끝까지 버텨 주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제가 참 비루해 보입니다. 저도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제가 아버지에게 받았던 그런 든든한 사랑을 전해 줘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역시 글을 쓰는 건 제게 힐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답답한 심사를 풀어내며 한 줄 한 줄 따라가 보니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말씀은 많지 않으셨지만 가끔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가셨던 아버지의 뭉툭한 손길이 떠 오릅니다. 저는 부모님과 지내면서 어떤 큰 불안감은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사업이 안 좋게 끝나고 어머니가 김밥 가게를 하시며 생계를 유지할 때도, 두 분 다 힘드셨을 텐데도 가정에서의 불안감은 전혀 없었습니다. 갑자기 울컥해지네요. 저희 부모님 두 분은 힘든 상황에서도 그렇게 악착같이 버텨 주시고 결국 저희 남매를 사람구실 하게 키워 주셨는데, 저는 꼴랑 몇 년 힘들다고 도망갈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회사 교육에서 고민상담을 하라고 하길래 힘들지만 용기를 내어 제 사연을 교육에 참석하신 분들 앞에서 공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저와 비슷한 고민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만 겪는 유별난 고통이 아닌,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라는 걸 알고는 이내 제가 짊어진 그 무시무시하던 짐이 이제는 제법 짊어질만한 느낌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저도 간절히 원하고 찾다 보면 이 위기를 넘어설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10년 후에 오늘의 이 글을 보면 피식 웃을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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