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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May 17. 2024

[職四] 퇴사한 선배들과의 한잔

직장인의 사계 - 겨울 [나도 언젠가는 바람에 날릴 것을 알기에]

  회사에 한 차례 한파가 지나갔네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번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언제고 제게도 그 바람이 세게 몰아칠 수 있기에 늘 마음을 비우려 하지만, 사람인지라 여전히 나는 아니길 바라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이렇게 바람이 지나갈 때 잘못된 장소에 계셔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나게 되는 분들이 있지요. 아직은 제가 회사생활 20년을 다 채우지 못했으니 선배님들이 대부분이십니다. 그렇게 떠나신 두 분 선배님들과 어제저녁 자리를 했습니다. 근 4,5년 만에 만나 뵌 자리였는데, 다른 건 모르겠는데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더라고요. 비결을 여쭤 보니 스트레스라고 하십니다. 스트레스가 없어지니 잠도 잘 주무시고 밥맛도 좋다고 하시네요. 삶이 편안해지는 방법이 이렇게 단순한가 봅니다. 들고 있는 걸 툭 하고 내려놓으면 되는데 참 다들 어렵게 살아가는 것 같네요. 문득 반성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가슴이 뛰는 그런 삶을 살고자 했던 제가 여전히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지 불문명하고, 가슴은 자주 무너져 내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만 조급해졌습니다. 


  요즘의 일상을 여쭤 보니 한 분은 책 보고, 공부하고 사시고 다른 분은 공 치시거나 연습장 가시고 댁에서 막걸리 한 잔 하시면서 지내신다고 하네요. 두 분 다 20년 이상 열심히 직장 생활하셨던 분들이기에 또 가능한삶이기는 하겠지만, 사실 언제고 덜 먹고 덜 쓰면 가능한 삶이긴 합니다. 


  저도 삶에 잠시 여유를 두기 위해 회사에 일찍 오기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상도 하고 싶고, 보고 싶은 책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지만 게을러진 건지, 타성에 젖은 건지 영 추진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성질 머리가 드럽고, 한다면 하는 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세파에 둥글어진 건지 영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가끔은 과거의 그 독한 성격이 그립기도 합니다. 특히나 몸에 붙는 지방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예전에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원하는 무게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요즘은 더 늘어나는 걸 막기도 버겁습니다. 그러니 그냥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결심하지 못하고 조직을 떠나려 부단히 노력해 봤지만 제가 알게 된 건, 저처럼 조직을 떠나려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조직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자진 퇴사를 하는 사람들은 정말 갑자기 떠나 버립니다. 어떤 준비나 생각 없이 그냥 나갑니다. 저처럼 이것저것 재고,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다들 소주 한잔에 시름을 싣고, 담배 한 대에 근심을 담아 보내고는 그렇게 하루하루 직장인으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다시 소주잔 앞으로 왔습니다. 선배님들께서는 주량도 느셨는지 이전보다 더 잘 드시네요. 스트레스와 잦은 술자리, 부족한 수면으로 늘 고생했던 간이 시달림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쭉쭉 잘 드십니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남겨진 자의 술잔이라 그런지 유독 쏘주가 쓰게 느껴집니다. 그 쓰디쓴 소주를 연거푸 마셔서 그런 지 속이 영 좋지 않습니다. 시원한 동태탕이 땡기는 아침입니다. 이제 막 출근했는데 퇴근하고 싶은 그런 날 다들 있으시잖아요. 연차 쓰고 찜질방에 가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다음 주 그룹 보고 자료부터 오늘 내부 보고 문서까지 빼곡히 박혀 있는 다이어리의 일정을 보고 있노라니 숨 막히기도 하면서, 뭔가 내가 아직 쓰임이 있다는 위안도 얻는 이 역설은 무엇일까요. 곧 월급날이니 용돈도 받겠다 오늘은 플렉스나 해야겠습니다. 평소에 고마운 후배에게 스벅 커피쿠폰을 보내야겠습니다. 늘 고마웠다는 생뚱맞는 메시지와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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