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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Jun 19. 2024

[職四] 쏘맥 블라인드 테스트

직장인의 사계 - 가을(쏘맥 블라인드 테스트로 고찰해 본 시간의 힘)

    얼마 전 유관부서 사람들과 저녁 자리가 있었습니다. 메뉴는 아귀찜, 해물찜이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저녁 회식이 있는 날은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움직여 봅니다. 퇴근 후 너무 여유를 부리면 7시가 다 되어 늦게 자리가 시작되고 그러다 보면 취침시간이 자연 늦어지기에, 잠이 많은 저 같은 사람은 서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도 후다닥 정리를 하고 저녁 장소로 향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안주를 시키고 본격적으로 술 마시기를 시작할 무렵, 후배의 한 마디를 들었습니다. '여기 테라 2병이요.' 저는 얼른 말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장님! 테라 말고 카스로 주세요'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제게 운명의 테스트가 다가온 것이. 주변 사람들이 '테라나 카스나 쏘맥 말면 다 똑같은데 유난을 떠냐'며 제게 핀잔을 줬습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저도 나름 쏘맥 좀 말아먹어 본 사람입니다. 주신까지는 아니어도 주당급에는 든다고 자부하는 저였기에 호승심이 일었습니다. 제가 제안합니다. '좋다! 그럼 쏘맥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자. 카스, 테라, 켈리 3가지 맥주로 만들어 놓은 쏘맥을 마시고 구별해 내겠다'라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중에서 두 분이 특히나 거센 저항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기도 차지 않는다며 구별해 낸다고 하면 2만 원씩 주겠다고 통 큰 제안을 해왔습니다. 옛말에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바로 승낙하고 입을 물로 헹구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제 몸 구석구석에 앉아 계시는 주신 바쿠스 님께 요청했습니다. 늘 하던 대로 나를 도와주십사.


    제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총 세 잔의 쏘맥을 말아 뒀습니다. 

    첫 번째 잔에 입을 갖다 댑니다. 웃음이 나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켈리였기에 쉽게 맞혔습니다. 독특한 향과 맛이 있기에 쉽게 걸러 냈습니다. 다음은 둘 다 특별히 맛이 없어 밍밍한 카스와 테라입니다. 두 번째 잔을 잡았습니다. 물론 입도 헹궜구요. 이게 뭐라고 삼사십 대 어른들이 다들 진지합니다. 2만 원씩 테이블에 올려놓은 두 분은 더욱더 저의 실패를 바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구요. 두 번째 잔을 마시고 연거푸 세 번째 잔도 마셨습니다. 마음속에 확실한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이거는 카스, 저거는 테라'를 외쳤습니다. Congratulations!! 제가 쏘맥 세 잔에 들어간 맥주를 모두 맞혔습니다. 


    내기를 했던 두 분은 입이 벌어진 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저는 냉큼 상금을 거머쥐었습니다. 다들 박장대소하는 그 와중에 유독 두 사람만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친히 세 종류의 쏘맥을 말아 드렸습니다. 한 번 장난 삼아 구분해 보시라고. 두 분 다 실패했습니다. 카스와 테라의 구분에 실패하더군요. 

    저는 의기양양하게 술자리에 임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개선장군마냥 그렇게 영혼을 촉촉하게 적시었습니다. 거금 4만 원은 후배에게 택시 타라고 쥐어 주고는 거만한 미소를 띄우며 내기에 진 분들께 윙크를 해 드렸습니다. 


    십 대 시절부터 술을 가까이했으니 이제 30년 정도 모셨네요. 이 정도 가까이했으면 쏘맥 마시고 맥주가 어떤 건지 정도는 골라내야 되지 않을까요. 이게 바로 시간의 힘인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새로 나온 크러시라는 맥주를 추가해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봐야겠습니다. 새로운 도전과제가 생겼네요. 다행히 오늘도 저녁 자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크러시를 마시면서 제 가슴 깊은 곳에 모셔둔 바쿠스 님에게 그 풍미를 기억해 주십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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