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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四] 나쁜 놈도 아프다!

직장인의 사계 - 겨울(힘든 합리화 작업을 진행하며)

by 등대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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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네요. 지금 현재 근무 중인 부서에 배치받아 합리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방만하게 운영되던 설비와 인력 위주로 일단 정리를 시작합니다. 이후에 조직문화 개선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쉽지 않은 기존 조직원들의 저항에 부딪히며 정말 꾸역꾸역 하나씩 정리해 나갔습니다. 다행히 똘똘한 팀원 두 명 덕분에 무사히 진도를 뺄 수 있었습니다.




정리의 과정에서 다 놓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거슬러 뜻을 관철시키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가는 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반목이 깊어져 제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사업부원들의 태도로 인해마음에는 온갖 생채기가습니다. 사업부를 없애려는 나쁜 놈이니 뭐 한 편으론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한창 인력 조정을 진행하던 어느 날 다른 사업부의 선배가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금 블라인드에 올라있는 이니셜이 하나 있는데 전사 조직도를 보니 너밖에 없는 같으니 확인해 보라고 말이지요. 맞습니다. 제가 아무리 봐도 제 이름 밖에 없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제 이니셜이 상당히 낯설어 보였습니다.


이니셜 앞에 '쓰레기'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습니다. '쓰레기 XXX'

'쓰레기'라는 수식어가 붙으니 더더욱 눈에 설었습니다. 대학에 와서 쓰레기 같은 삶이 멋있어 보여 낮술을 일삼고, 아무 곳에나 벌러덩 눕는 정말 쓰레기 같은 생활을 하곤 했었지요. 그래도 그 당시의 삶은 제가 선택했던 삶이었으니 '쓰레기'란 수식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게 쓰레기라며 돌을 던지는 상황이 되어보니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휴대폰 화면의 이름을 보다가 불현듯 눈물이 흘렀습니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도무지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나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고 수술이 필요한 조직에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데 도리어 배은망덕한 행태에 대한 서운함,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억울함까지 온갖 감정이 교차되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길로 회사를 나와 그냥 걸었습니다.


30분여를 걸었더니 얕은 산이 나와 올랐습니다. 1시간여를 걸었더니 내려가는 길이 보여 내려갔습니다. 30분여를 걸어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냥 눈물을 완전히 말리는 걸리는 시간을 요량으로 걸었는데 문득문득 여러 감정이 밀려와 다시 적시곤 했습니다.


걷고 걷다 보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 일은 제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물론 배운 부분도 있어서 조금은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지요. '세상사 다 내 맘대로 안 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내 맘같이 않다'는 아주 훌륭한 교훈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래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정리를 한참 진행하던 작년의 저는 우울증 초기 증상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한다고 차츰차츰 마음이 편해졌으니,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영원히 올 수 없듯 삶에도 늘 나쁜 일만 있지 않으리라, 어떤 일도 나쁜 일이라 여기지 않으리라 마음 가짐을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가라면 가지 않을 시간이지만, 힘든 일들이 늘 그렇듯 여기저기 남겨져 있던 일들은 이제 새살이 돋아나고 더 단단해진 저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올해 들어서 상황이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업부 손익은 마이너스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외법인 한 곳이 저희보다 적자의 규모가 커서 슬쩍 집중포화에서는 비껴 나 있습니다만 언제나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지내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직장생활인데 타고난 역마살 때문인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슴 아픈 기억들도 있고 뿌듯했던 기억들도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삶은 오르막 내리막이 맞나 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오르막에 있는지 내리막에 있는지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허방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이따금씩 멈춰 서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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