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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四]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직장인의 사계 - 겨울(삶에는 늘 길이 있을지니. 찾으시라 열심히)

by 등대지기

최근 연말연시를 지나다 보니 저녁 술자리가 많았습니다. 회사에서의 저녁자리부터 친구, 지인 등 여기저기 저녁 먹으며 이야기할 기회가 늘어 나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회식자리 하면 술이 빠질 수 없고, 술인 한 잔 들어가면 조금이나마 속내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도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을 저는 사실 약간은 경계를 합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하고 굳이 자주 자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더 해서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들도 별로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저도 참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네요.


여하튼 아내와 큰 아이와의 불화로 늘 시끄러운 집안과 손익도 안 좋고 미래도 안 보이는 회사 상황 모두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는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름 터프한 시기를 보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한 곳 마음 둘 곳이 없어 혼자 오랜 시간 걷기도 하고 술의 신을 받아들여 젖어 살기도 해 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적셔도 아무리 걸어도 무언가 바뀌는 건 없었습니다.


잠시 덮어둘 수 있었을 뿐 상황이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물론 마음공부 하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습니다. 그런 최소한의 조치조차 없었더라면 정말 제 자신을 제가 부숴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분노가 저를 지배하던 시절 저는 제게 위협을 가하는, 즉 공격이라 생각되는 행동을 가하는 모든 이들에게 제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그렇듯 아주 거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거친 욕설을 뱉기도 하고 물건을 두드리기도 하고 심할 경우 집어던지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일부러 상대편 가슴을 후벼 파거나 자존감을 떨어 뜨릴만한, 소위 말하는 '뼈 때리는' 말들을 너무도 쉽게 하고 살아왔었습니다.

이러한 분노의 마지막 대상은 늘 저 자신이었습니다. 제 자신에게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화를 내고 있는 저를 보면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년에 멈추기 위한 과정을 시작했으니 9년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책도 보고 명상 코스도 가 보고 세미나에도 가봤습니다. 운동도 해 보고 산도 올라 보고 걷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끌고 온 상태가 지금의 제 상태입니다.


정말 열심히 살고 또 열심히 공부하고 더 잘 살아보려 노력했는데 늘 삶은 진창이었습니다. 발을 옮기면 푹푹 빠져서 어렵게 발을 뽑아내도 신발 하나쯤은 냉큼 집어삼키는 끝이 보이지 않는 뻘밭이었습니다. 이왕 뻘밭에 왔으면 조개나 줍고 가면 그만인 것을 뻘을 탓하고 뻘에 빠진 자신을 탓하며 그렇게 하드캐리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제 성격상 남 앞에서 제 치부를 잘 드러내 보이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집단으로부터 도태되고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작년 그룹 교육에서의 아주 작은 커밍아웃 이후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은 팀장들을 위한 1박 2일간의 합숙훈련이었습니다. 첫날 오후에 심리학 교수님의 강의 때 대뜸 교수님께서 '혹시 사람들 앞에서 본인의 고민을 얘기해 보고 싶은 사람 있나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제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갑자기 손을 들어 버렸습니다. 혹여 누가 얘기해 보라고 시킬까 봐 늘 두려워하던 저였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하튼 제 철없는 손 덕에 그렇게 저는 40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심하게 다투는데 도무지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나도 회사 가서 힘들고 지치는데 집에 가면 더 지친다. 뭐 어쩌라는 지 모르겠다 등등. 그 수업에서 답을 얻거나 큰 도움을 받은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제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타인들에게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 얘기를 들은 비슷한 또래의 많은 분들이 제게 본인도 비슷한 상황으로 힘들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시기도 해서 우리네 삶에서 당연히 지나야 할 관문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내 상황을 바라보면 달라질 수 있을까?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처한 주관적 상황을 저 건너편 팀장의 얘기로 생각하면 의외로 상황은 심플합니다. 늘 '나'라는 존재가 끼어들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아지경이니 제법무아니 하는 말씀을 하셨었나 봅니다.


우리네 삶은 왜 이리 힘들까. 영적 성장을 위한 공간이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그럼 난 어찌 살아야 하지? 이번 생애 주어진 숙제를 충실히 풀어내고 훌훌 떠나면 됩니다.


정리하고 보니 말이 참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름 방황을 하며 깨달은 건 '누구도 내 숙제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과 '숙제는 필연적으로 답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5번 답 없음'이라는 항목이 없으니 언젠가는 풀 수 있습니다.


언젠가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 했던 일들이 내 삶을 지탱한 기둥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제가 마음속에 스승님으로 모신 구본형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아내와 큰 아이는 전쟁을 치릅니다. 고놈의 휴대폰이 발단이 되어 과거사까지 등장하는 걸 보니 쉽사리 마무리될 국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버럭 찬스'를 써서 쉽게 문제를 덮으려 하겠지만 이젠 표출될 것들을 다 끄집어내도록 잠시 떨어져서 바라봅니다. 이 또한 잘 해결이 될 것이고 상황은 저절로 나아질 것이 때문에 조바심 내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되 상황 자체를 탓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시련은 감당할 만큼만 주어진다 하니 느긋하게 마음먹으면 될 것이고 고통도, 이내 곧 사라지니 진드감치 기다리면 될 것이며 오늘 하루도 아주 더디게 성장할 터이니 서두르지 말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하면 숙제를 마치고 '참 잘했어' 도장을 받는 그날이 오겠지요. 그날이 오면 맘 편히 손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더 정갈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감정이고 재물이고 덕지덕지 쌓아두지 말고 훌훌 털 수 있도록 가볍게 살아야겠습니다.


이렇게 다 뱉어내고 나면 후련한 느낌이 듭니다. 막말 대잔치 같기는 하지만 제 능력이 아직 미천하니 이렇게나마 정리라도 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은 정말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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