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職四] 추억은 통일호를 타고

직장인의 사계 - 봄 (부산 가는 출장길 떠오르는 추억들)

by 등대지기

오랜만에 부산 출장을 가는 길에 고속철을 탔습니다. 고속철을 타고 그야말로 고속으로 국토를 종회무진 누비고 달리는 기분은 그 속도만큼이나 상쾌합니다. 어릴 적 제 맘속 기차 여행이 문득 떠 올라 추억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통일호는 온통 옥빛으로 칠해 놓은 좌석커버의 색상과 까실거리는 질감으로 다가옵니다.


지금의 고속철과 비교하면 정말 완행열차였건만 그래도 사촌동생들과 매년 2번씩 하던 그 할머니 댁으로의 여행길은 늘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차에 앉아 오손도손 나누는 대화부터, 온갖 게임,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 두 분께서 선반 위의 보따리를 내릴 때마다 선물처럼 등장하는 간식까지 어느 것 하나 따뜻하지 않은 추억이 없습니다.

그렇게 기차는 추억을 싣고 기적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굳세게 달려갑니다. 기차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니고, 맨 끝칸까지 뛰어가 하염없이 멀어지며 줄기차게 따라오는 철길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웠던 기억들. 열린 열차문으로 들어오던 그 눅눅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던 끈적이는 추억.



늘 통일호에는 추억이 묻어 있습니다. 중 3 정도 되었을 무렵, 그래도 저와 친구들을 예쁘게 봐주셨던 학원 선생님 한 분과 5명 정도 같이 지리산에 놀러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좌측에 가까웟던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여행지를 지리사으로 택하신 것도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 ‘태백산맥’과 연관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하튼 문제의식으로 젊은 날을 다 태워 버려 머리숱이 많지 않았지만, 안광이 강했으며, 국내 최고학부 출신의, 카리스마 있는 음성의 선생님이셨습니다. 여름방학의 어느 날 우리는 그렇게 무려 무박 2일의 강행군으로 지리산 등정에 나섰습니다. 선생님이 계셨지만 부모님 없이는 첫 여행인지라 많이들 설레었고 실제로 모든 순간 자체가 빛나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밤 늦게 출발해 구례역에 해가 뜨기 전에 내려주는 통일호.


우리는 입석이었으므로 승강장 사이의 공간에 똬리를 틀고 동양화를 감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력 6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 같네요.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광도 팔고 피도 모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차와 차 사이의 그 연결공간은 누군가에게는 담배 한 대의 여유를, 누군가에게는 귀중한 휴식을, 누군가에게는 대화의 장을 열어주곤 했습니다.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 한껏 목청을 높여야 하였지만 '타당 타당'하는 기차 달리는 소음 사이로 들리던 상대방의 목소리가 훨씬 더 정감 있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지리산 여행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비슷한 멤버로, 이번엔 더 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인 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용기였는지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5명의 친구들이 텐트 하나와 코펠 등을 주섬주섬 챙겨서 또 그렇게 통일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우리의 요새인 차량 사이의 공간에 우리는 또 동양화 감상을 하기도 하고 맥주 한잔에 호기롭게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바다로 떠났습니다. 놀이가 지겨워질 때쯤 서대전역에 도착을 했고, 서대전역에서는 15분 가까이 정차를 한다고 하는 소리에 냉큼 뛰어내려 가락국수를 한 그릇씩 뚝딱 해치웠습니다. 미리 삶아 둔 면에 국물을 얹은 그 온기만 어렴풋이 품은 국수에 단무지를 한껏 베어 물며 그렇게 국수가락을 튀어가며 웃어 댔습니다. 어쩌다 본가에 가서 가끔 그 당시의 사진을 꺼내어 보면 그 밝고도 밝은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나름 사춘기라며 나름의 세상을 짊어지느라 고민도 많고 방황도 하던 시절인데도 어찌나 표정이 밝은지.



물론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첫사랑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새내기 시절 동기 여학생과 함께 했던 기차여행도 있고 군대를 가기 위해 탔던 기차 여행도 은은한 향을 풍기며 제게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통일호는, 통일이라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게 많은 추억을 선물하고 기억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늘 제게 기차는 설레임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통과의례였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편하게 뛰어들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낯설지만 꼭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떠나는 기차 여행이 좋습니다.

곧 연휴가 다가옵니다. 가까운 야외로의 기차여행 어떠세요? 혼자 떠나도 좋고 맘이 맞는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 좋지 않을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職苦] 팀장님! 고민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