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職四] 빠르지 않음의 미학

직장인의 사계 - 봄(늦은 출근길에서 생각해 보는 느림의 미학)

by 등대지기

환승역에서 지하철 갈아타려 내릴 때 저는 늘 조마조마합니다. 늘 마음 조리며 열차를 타러 빠른 발걸음을 옮깁니다. 물론 제겐 든든한 친구들이 많아 전혀 외롭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빨리, 거의 전력질주로 달려가는 분도 계시고 저처럼 주변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걷는 분들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출근시간 보다 1시간 반정도 일찍 회사에 도착해서 이렇게 글도 쓰고 제 공부도 합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이 고요함과, 그 사이로 들리는 제 키보드의 경쾌한 타닥거리는 울림이 좋습니다. 늘 마시는 모닝 도라지차의 향까지 더 해지면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한 마음 상태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루틴이 망가지는 날이 있습니다. 보통은 과음한 다음날이지요. 그런데 이게 또 재미있는 게 느지막한 출근은 또 나름의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빠르지 않음의 미학, 이미 늦어 버렸다고 생각하니 서두를 맘도 생기지 않습니다. 비를 한 두 방울 맞을 때야 피하려고 애쓰지만 옴팡 뒤집어쓰고 나면 에라 모르겠다 비를 즐기게 되는 것처럼 여유를 부립니다.

어차피 출근시간만 맞춰도 충분하기에 환승역에서도 한쪽으로 비켜서 천천히 사람들 몰려 가는 모습도 구경하고 뒷짐 지고 팔자걸음으로 지하철 역사를 둘러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루틴이 깨지고, 평소보다 늦어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는 이 순간에 저는 삶의 지혜를 배워 봅니다. 빠르다고 무조건 좋기만 한 건 아니고, 느리다고 무조건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는 누구나 빨리 가려 하고 조급해합니다. 비단 출근길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회사에서도 주변보다 진급이 늦으면 퇴사를 고민할 정도의 상심을 하기도 하고 밥 한 그릇도 먼저 먹으려 부산을 떨어대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빠르다 느리다는 판단도 모두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러니 그 판단을 유보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내 자유입니다. 쉽다면 매우 쉬운 이 마음 뒤집기에는 수행이 필요하긴 합니다. 요가, 독서, 명상 등으로 마음을 챙기는 분들이 늘어나는 걸 보면 느린 시간들이 분명 삶에 도움이 되기는 하나 봅니다.




오늘을 저는 느림보의 날로 정했습니다. 하루 정도는 텐션을 늦추고 조용히 즐겨보려 합니다. 평상시에 온갖 것들로 마음 쓰며 하지 못한 중요한 프로젝트에 느림보처럼 매달려 찬찬히 바라보고 판단하고 방향을 잡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합니다. 조용한 회의실을 하나 잡아 놓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 커다란 종이를 놓고 디자인해 봅니다. 이렇게 곰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잠시나마 여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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