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라는 사랑 “너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 글을 쓰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열망. 그라포마니아(graphomania), 글을 쓰고 싶은 강박적 충동.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다면 유명한 사례들을 한번 찾아보시라.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세라망구소의 [망각일기] 한 페이지에 쓰여진 글이다. 얼마전 한 작가님에게 추천을 받아 읽은 책인데 이런 용어가 있는 줄 몰랐다.
어떤 상황이나 무언의 아름다움, 혹은 강렬한 인상이 마음 속에 스치거나 그려지는 순간에 나는 언제나 기록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관된 하나의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경우에 여러 방식으로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이건 내가 중,고등학생때부터 지녀온 습성같은 것이기도 했고, 때로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현상인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
윤우가 생기고 부터는, 되려 ‘기록’에 대한 폭이 더 넓어졌다.
아이를 가지기 전에 있던 다양한 기록에 대한 강박과 같은 것들이 몇가지 삭제되고 붙여진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것과 더불어 살이 붙여진거다.
그러니, 내가 기록해야만 하겠다고 느끼는 순간이 더, 더, 더 많아졌고 넓어졌다.
요즘에 아주 많은 순간, 강렬하게,
내게 기록하기를 종용하는 순간들이 또 하나 늘었다.
‘기록해요, 기록해야 해. 이건 지나가면 안되요. 잊어버리기 전에, 이 아름다운 추억들을 간직해야해요. 예쁘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해~ 고이고이 간직하고, 두고두고 꺼내어 회상할 수 있게요. 시간이 지나면, 이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날아가버릴 수도 있어요.’
오브제.
윤우의 추억과 손길이 담긴 오브제들.
각종 장난감, 책, 놀이기구, 옷과 신발.
윤우가 신생아일 때부터 가지고 있던 책이 몇가지가 있는데, 그건 바로 영국의 대표적 유아문학 maisy 시리즈였다.
한 날 호주에 살던 친한 동생이 잠깐 들린 한국에서 건네준 선물이었는데, 아직 글자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할 개월수에도 윤우는 유독 그 그림책을 좋아했다.
책을 보여주며 읽어준 영어발음이 호기로웠는지, 작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컬러감과 그림체가 윤우의 마음을 사로잡은건지는 알 수 없으나 윤우는 언제나 다른 책은 제쳐두고 maisy 책을 읽어주면 한참을 집중하며 읽고 보는 거였다. 아직도 내 핸드폰 사진첩에는 작년의 신생아시절부터 지금까지 커오는 일년반이 넘는 시간동안 윤우의 손에 들려있는 maisy책 모습이 아주 많다. 다른 책은 좀체 이처럼 집중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아서였다. 신기할정도로 몰입해서 보고, 또 보고, 또 보면서 윤우는 이 책의 시리즈를 여러권 모두, 한번에 열번은 족히 되돌임표하듯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데 그 많은 시리즈 책 중에서도, 유독, 유난히 윤우가 좋아하는 책이 있었다. 그건 바로, [maisy goes to london] 책이었다.
동생이 사준 책 한권으로 말미암아, 여러 시리즈 책을 틈날때마다 사들였고, 이 책은 특별히 나도 윤우에게 읽어주며 즐거움을 느끼는 책이었다. 내가 런던을 워낙 좋아하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윤우는 이 책의 어떤 부분이 좋은건지, 유독 이 책을 들고서 날 붙잡는 날이 많았고, 돌아서면 언제나 내 뒤에서 런던책을 두 손으로 잡고서 읽어달라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윤우가 난생 처음 애착과 같은 책이 된 [maisy goes to london] 이, 어느새 너무도 낡고 헤져 산지 이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고 너무 자주 페이지를 펼치고 넘긴 탓에 성하지 않은 곳이 없어졌다.
이제는 윤우가 새롭게 읽기 시작한 다른 한글책들이 있어, 이전만큼 하루에 수십번 펼쳐내는 책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윤우는 런던책을 찾아 꺼내서 내게 읽어달라며 가지고 오곤 한다.
‘이 정도로 낡고 헤진거면 새로 사는 게 낫겠는데….’
윤우가 워낙 좋아한 애착책이라,(처음으로 윤우가 가장 좋아하게 된 책이라는 게 나에겐 의미롭게 느껴진다.) 여기저기 찢어져도 커다란 투명 테이프를 구해다가 말끔하게 다시 붙여놓곤 했다. 그렇게 테이프로 시술까지 해놓은 책이 그 상태로 또 한참을 읽히고 읽히다가, 이제는 정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낡아 진거다.
윤우와 내가 모두 애착하는 책인만큼, 깔끔하고 예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싶어, 같은 책을 새로 살까도 생각해봤지만 언제나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책을 버릴 수가 없는 거다.
윤우가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 그 자그만 고사리같은 손으로 페이지 하나하나 넘겨가며 집중하던 모습, 이 아기가 뭘 안다고 이렇게나 그림 하나하나 글씨 하나하나를 열중해서 읽어나가고 봐나가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안가면서도 신기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던 기억,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음에도 자꾸만 다시 첫 페이지를 열어달라고 성화를 부리던 아이를 못이기고 앉은 자리에서 열번 남짓을 계속해서 읽어주던 기억, 돌아서면 아이가 읽어달라며 두 팔로 책을 꼭 안고 부엌으로 와 나를 기다리던 모습.
그런 것들이 다 담겨있는 소중한 책이 되어버렸다.
뭐든 처음이 주는 행복감과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아이가 크면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기억하지 않아도 돤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걸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기록과 같은 흔적들이 다 담겨있는 책을 버릴 수가 없는 거다.
똑같은 책을 새로 사면, 이 책에 붙어 있는 우리의 역사가 증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새로 쓰인 역사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닐 것 같아서.
그래서, 결국 고민을 반복하다 이 낡은 책을 정말정말 도저히, 완벽히 읽을 수 있을 상태가 아니다, 라고 판단이 될 때쯤, 한 구석에 보관해야겠다 생각했다.
똑같은 책을 또 사는 것은 아무래도 낭비인 거 같다며.
그러나,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나는 아이가 어린이집으로 떠난 뒤 고요한 집 안에서 런던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책의 구석구석을 펼쳐내어 사진을 찍었다.
어디에 남기든, 꼭 언젠가 기록으로 남겨야지.
나와 윤우의 소중한 기억과 추억이 담긴 이 오브제를, 불멸의 기록으로 남겨야지.
그리고,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아이와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고 추억해야지.
하나도 빠뜨림 없이, 소중하게 추억해야지.
이런 생각과 더불어, 아이와의 모든 순간들을 붙들어 기억에 매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잦은 순간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알록달록한 온갖 무지개색이 난무하며 춤추는 이 사랑스러운 것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순차적으로, 하나씩 사라지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커가는 아이따라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채워지고 비워지길 반복하겠지.’
최대한 지금 이것들을 눈에 넣고 마음에 넣자고 다짐한다.
배가 불룩한 채로 떠난 괌 태교여행에서 들뜬 마음 안고서 너무나 행복하게 사왔던 윤우의 첫 인형, 젤리켓 토끼와 용.
아영이가 첫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윤우에게 선물한, 귀엽게 반짝이는 푸우포장지 속 삐용이 인형.
그리고 매일 밤마다 귀여운 내의를 딱 붙게 입고서 아이들을 안고 뽀뽀하며 얼굴을 파묻고선 행복해하며 잠드는 윤우의 모습들.
수없이 계단만 오르내리더니 어느덧 슝슝 미끄러져내려오며 집안을 놀이터마냥 즐기던 윤우의 미끄럼틀.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만 같은 목재로 된 회전의자를 겁도 없이 뿌듯한 얼굴로 힘차게 타던 윤우.
윤우의 첫번째 어린이날 선물해준, 뽀로로 낱말카드를 햇볕가득 들어오는 거실마당에 앉아 한참을 읽고 고르기를 반복하던 고사리같은 윤우의 손과 열정넘치는 표정.
두해 어린이날 선물해준, 알록달록 귀여운 블록 장난감들.
매일 식사시간마다, “아 ㅡ 아ㅡ” 마이크 들고 귀여운 소리를 내던 윤우의 모습.
그 모든, 현재의 것들을 미래 속에 증발시키고 싶지 않아 나는 또 기록을 모색한다.
이렇게 쓰면서도 떠올려지는 사랑스런 윤우의 자그만 손, 집중하는 표정, 귀엽게 장난치는 얼굴까지 다 ㅡ 언제고 떠올릴 수 있게, 자꾸자꾸만 나에게 쓰라한다.
잊지, 말라 한다.
그러고보면, 그 어떤 순간보다도 아이와 함께 하는 ‘지금’이 나에게 가장 큰 기록의 화두인걸 보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추억과 기록은 ‘아이의 모든 순간’이구나, 싶다.
기록의 강박 ‘덕’에, 아이의 찬란한 모든 순간들이 아름다운 매거진으로 거듭날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는, 너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어.“ 하며,
늙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예쁜 정원 어딘가 앉아서 그것들을 읽고 바라보며 추억에 잠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