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준 Mar 30. 2020

"말없이 서로를 보듬는 시간 속에 나를 살게 한 사람"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중 <아치디에서>를 읽고



사랑이었을 수도, 우정이었을 수도, 삶의 전환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브라질 청년 랄도와 한국인 여성 하민의 이야기. 뜨거운 것도 없었고 그래서 식어버릴 것도 없었던.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것만 같기도 하고, 어쩌면 아치디에 머무를 동안 잠깐 행복했던 둘의 시간 그 자체가 시작이었고 또 끝이었는지도 모를 이야기.


이 작품은 처음엔 다른 단편들에 비해 느낌이 덜 선명하게 다가왔다. 색으로 치면 흐릿한 파스텔 톤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그럼에도 이상하게 책장을 덮고 마음에 남는 건, 여러 번 더 펼쳐보고 싶은 건, <아치디에서>였다. 낯선 타지에서 일어나는 이국적인 경험에 매력을 느끼는 나의 성향 때문이었을까, 전혀 가보지도 않은 먼 유럽 아일랜드의 아치디 시골마을의 분위기, 풍경 그런 것이 좋았던 걸까.



두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헤아리지도 공감하지도 못할 만큼 삶 자체가 고장나버린 랄도도, 늘 강해야한다는 압박에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다 결국 여럿에게 상처 주고 감정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리고만 하민도, 내겐 매력의 대상들은 아니었다.


물론 내게도 ‘하민’의 시간들이, ‘랄도’와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식구 많은 집 셋째 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내 용돈은 스스로 벌었던 내게 하민의 모습이 있고, 안 해본 알바가 없던 바쁜 그 안에서도 자주 공허해지고, 목적 없는 밥벌이에 멍해지곤 하던 내 모습 속에서 랄도의 모습을 본다.


늘 돈에 쫓겨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했던 고단한 시간 속에서, 쌓이고 쌓인 나의 감정들은 밖으로, 사람에게 표출하기보다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 나는 그랬다. 강해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때, 나한테는 미안해지더라도 남에게는 미안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칠 때, 남에게라도 잘 보이려다 나 스스로가 아픈 것도 모른 채 살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왜 그리 약하냐고, 왜 그 정도 밖에 안 되냐고, 동료 간호사들을 단죄하던 하민처럼 내게 말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처 주는 것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하민이 과거 이야기를 말할 때 마음 깊이 그녀이야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하민 같은 사람을 미워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랄도와 같은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랄도처럼 놓을 수 없었다. 생활을, 일을 그리고 나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경제적으로 의지할 누군가가 내겐 있지 않았다.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싶을 때도 분명 있었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에 그럴 수가 없었다. 꾸역꾸역 눈을 떠 일을 가고 학자금대출을 갚으며, 그렇게 청춘을 보냈다.


그런 내게 하민은 날 선 태도로 쉽게 다른 이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사람, 랄도는 자기 삶을 자포자기한 유약하고 한심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둘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던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이해와 아픔은 별개인 걸까. 그들에게 마음이 가는 나를 보았다. 나와 닮지 않은 듯 결국 닮아있는 이야기. 어쩌면 그들의 모습, 감정의 일부나마 실은 내게도 해상되는 이야기여서일까.

바닥끝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한심한 사람이 되어 보았고 또 하민처럼 꽤 오래 나 자신을 미워한 시간, 분명 있었기에.


“한심하게라도 살기까지 얼마나 힘을 내야 했는지, 마침내 배가 고프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밖으로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왜 나는 그를 온전히 비난할 수 없을까. 그런 감정이 낯설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찾아온 무기력을 자기 자신조차 어찌할 바를 몰라, 한 시절 그리 꽤 오랫동안 엉망이 되는 사람도 왠지 있을 것만 같아서, 그의 무기력과 바닥을 찍는 게으름에도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랄도는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산 하민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게 자꾸 브라질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엄마와 누나 마리솔이 생각났다. 자신 때문에 힘들었을 가족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무서워 슬퍼도 웃고 화가 나도 웃는 게 습관이 된 그는 처음으로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다. 자신과 다른 상대를 이해하는 일, 랄도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민은 운다.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쳐도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감정이 없던 하민이 누군가의, 그것도 자신이 혐오하던 나약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으며 운다.


‘끝’과 ‘끝’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보았다. 모든 나약함에도 이유가 있으며 강해보이기만 하는 사람에게도 약함이 있음을 서로를 통해 알게 된다. 너무나 달라 보였던 두 사람, 실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많이 닮아있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말없이 서로를 알아보는 표식이 되었고, 그렇게 아픔이란 건 다른 이의 아픔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치유되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또한 한국에서 환자들의 감정을,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곤 했던 하민, 그녀는 아치디의 마구간 일을 통해 진심으로 무언가를 ‘돌보게’ 되며 말들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정직하고 단순한 과수원의 노동을 하며 랄도는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민에게는 아치디가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쉬는’ 공간이 되고, 랄도에게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일을 하는 공간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아치디를 통해서도 치유되어 갔다.



사실 랄도가 아일랜드까지 온 건 전 여자 친구 일레인을 보러, 그녀가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마음, 맞았을까, 일방적이기만 했던 그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너 왜 여기 있어.” 하민의 물음에 랄도는 처음으로 제대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시간이 흘렀을 때 랄도와 하민, 그들은 서로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리고 나는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언뜻 우정처럼 보였다. 그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을 우연히 만나 서로의 다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보면서 좋은 자극과 영향을 받았던 사람으로. 두 번 세 번 읽으니 다시 보인다.


둘은 같이 있던 시간이 즐거웠음에도 앞 다퉈 먼저 아치디를 떠나려 하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기를 힘겨워 한다. 헤어짐을 앞에 두고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말없이 화가 나지만 그 이유는 자신들도 모른다. 언젠가 잠시 연락이 되지 않던 하민을 찾아 라페스트까지 가기도 하는 랄도. 일방적이었기에 일레인에게는 닿지 않았던 감정, 서로 간에 어떤 기류가 있었던 하민에게는 가닿는다.


그럼에도 헤어짐 앞에서 더 힘들어한 건 랄도가 아닌 하민이었다.


“니 차례야. 너 왜 여기 왔어, 나 때문에 온 거야?”


 랄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감정을 의식하게끔 하고 싶어 하는듯한 하민의 태도, 가장 좋아했던, 사실은 랄도와 너무 닮아 있는 게으른 말과의 헤어짐 앞에서 어찌할 바 몰라 먼저 떠나버리려고 하는 하민의 모습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그 만남을 기대하면서도 랄도가 오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아채고 마는 모습에, 랄도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음’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민은 의식하고 의식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때로는 늦게 깨닫는 사랑도 있나 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넌 네 삶을 살 거야.”


랄도는 몰랐지만 하민은 알았다. 아치디에서 둘의 관계가 마지막이었음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또한 둘 사이에 흐르던 감정이 사랑일수도 있음을 하민은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랄도는 수년이 흘러서야 깨닫는다. 알지만 잡지 않은 하민. 그런 종류의 마음 안에는 무엇이 있나. 그 마음을 난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치디에서의 평생에 남을, 서로를 변화시켰던 사람과의 너무도 소중한 추억을 각자의 삶 속에 품은 채 떠나고 싶었던 걸까. 아프고 엉망이었던 둘, 서로를 통해 치유되면서 이젠 아치디를 떠나 각자의 새로운 삶으로 가야했던 걸까.


화장솜에 물기가 퍼지듯 읽는 내내 그저 마음 안에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 그러다 지나가는 한국인들을 볼 때 하민을 떠올리고, 그녀가 썼던 메모를 꺼내 보며 자신이 그녀를 많이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랄도를 보며, 어쩌면 사랑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랄도를 보며 결국엔 눈물이 터져버렸다.


살면서 평생에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잊지 못할 추억을 갖고 살기도 한다. 그 기억들이 애틋하면서도 아픈 건 그 기억 안에 있는 이들은 지금은 만날 수 없고 각자의 그리움 안에서만 만나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랄도와 하민의 이야기에 내 마음이 그리도 많이 움직였던 건 살면서 만나곤 하는, 내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인연의 부서짐, 헤어짐을 우리도 수없이 맞으며 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떠올리면 아프고 그립기만 한 이들이지만 고마운, 잊지 못할 그 누군가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들이 있는 것이리라.
먼 이국의 땅 아치디를, 랄도와 하민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상처를, 때론 사람에게 치유되던 그 상처들을, 내가 받았던 위로들을 떠올려 본다.




작가의 이전글 존 윌리암스의 소설 _ <스토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