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냥 살래요.
“키만 크면 돼. 얼굴은 싹 고치면 되니까. 넌 외모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해.”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문는이 넌 타고나길 못생겼지만 키가 큰 건 다행이야. 여자는 예뻐야 해. 근데 머리도 좋아야 하니까 일단은 대학을 잘 가자.’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쁘다던데. 내 엄마는 자식에 대한 자기 객관화가 잘 됐던 건가. 현실적이었던 건가.
나는 엄마의 말을 반만 수용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앞머리를 말거나, 입술색이 죽으니 틴트를 발라야지 하는 외모 꾸미기에 무관심했던 나는 엄마가 골라서 사주는 대로 옷을 입고 다녔다. 엄마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나와 체형이 비슷해 옷을 공유해 입었다. 그래서 나도 패션피플인 엄마의 안목을 맘 놓고 믿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엄마 취향의 옷을 입고 다니던 나는 그 옷으로 오해를 받고 불편한 일들을 겪었다.
여고생인 나에게 "문는이가 좀 sensual(관능적인) 하잖아." 하며 칭찬인 양 너스레 떨던 영어쌤. 신입생 인사회에서 대뜸 “너 때문에 여기 싸움 나겠다.” 하던 선배. “문는이가 벗겨보고 싶은 몸매긴 하지.” 하던 아저씨들.
어이없는 외모 품평은 나의 반골 기질을 자극했고, cc연애를 끝낸 어느 봄날, 나는 기숙사 룸메에게 긴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다. 특별한 이벤트에 신난 친구는 적극적으로 가위를 놀렸고, 거울에 비친 한 방향으로 쏠린 단발머리를 보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다음 날 한쪽으로 치우쳐진 비대칭인 내 머리를 미용실에서 교정받고부터 더 이상 어깨 아래로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vintage 아닌 빈 티
그리고 멋쟁이 엄마가 골라준 여성스러운 옷들은 옷장 구석으로 밀려났다. 자라, 21포에버 등의 SPA 브랜드의 성행과 함께 나는 발품을 팔며 내 취향의 빈티지 감성의 박스티와 펑퍼짐한 옷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제주에 갈 때마다 엄마는 내 옷이 '빈티지가 아니고 빈 티’라며 눈을 흘겼지만, 나는 옷을 통해 내 남다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좋았다.
졸업 후 고시촌에 들어가고선 공부를 핑계로 단발을 숏컷으로 치고 공대생 체크 셔츠를 즐겨 입고 투박한 책가방을 메고 다녔다. 지나가는 남자가 돌아보며 다 들리게 “남자였어?” 하면 '그래. 나 키 큰 여자다.' 하며 더 이상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외모 품평과 성추행을 당하지 않는다는 해방감과 내 남다른 스타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오랫동안 나의 패션 변천사를 보아온 내 친구는 말한다.
“너의 자존감을 컵으로 표현하자면, 넌 엄마 때문에 그 컵을 아예 부셨어.”
예쁘고 스타일이 좋은 내 친구의 말이 꾸밈새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나에 대한 염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나는 나 좋을 대로 외모 콤플렉스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요즘도 나는 계절감이나 남들의 시선보다 편의성과 개성을 우선시해 옷을 입고 다닌다. 할머니와 엄마의 기대처럼 55 사이즈가 아니라서 싸고 다양한 스타일의 지하상가 옷은 쳐다도 안 보지만, 입었을 때 편하고 기분 좋은 옷을 사 입는다. 그래서 스키니진에서 와이드 팬츠로 바지 유행이 바뀌고, 페미니즘의 유행으로 ‘탈코르셋’이란 말이 생긴 시대의 변화가 기껍다.
최근 내가 제일 아끼는 옷은 1년 전 모 브랜드에서 낸 생활한복이다. 나는 그걸 색깔별로 세 세트나 사서 기분에 따라 골라 입는다. 맨즈 자라 반팔에 니트 조끼, 가죽재킷을 걸쳤지만 아래는 스님 바지, 그게 내 스타일이다. 요 바지는 펑퍼짐해서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으면서 남들보다 튼튼한 내 허벅지가 걸릴 걱정이 없다. 무엇보다도 밥을 먹을 때마다 부른 배가 나와 가스가 찰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관심 말고 밥으로 채울게요
더운 여름 머리털 반을 남기고 밑을 싹 민 내 머리를 본 금동이는 기겁했다. “엄마! 누나 영하고(이렇게) 다니는 거 냅둬?!” 난 사회생활을 통해 어느덧 훌륭하게 젊은 꼰대로 자란 금동이의 성장에 개탄함과 동시에 엄마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게. 아들 하나 더 생긴 거 같다.”
제주에 귀향 후 내 스타일을 향한 엄마의 비난과 간섭은 심해졌다. 외출을 할 때마다 옷을 열 번은 갈아입고 괜찮아 보이냐며 확인받는 엄마에겐 도무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딸이 신기했을 것이다. 거기다 주변에서 선개팅을 주선한다며 난리인데 이 딸내미는 도저히 예쁨 받을 스타일이 아니다. 다른 집 딸들은 머리도 하고, 원피스도 사고 한창 예쁘게 꾸미고 다닐 시기인데… 얘가 돈이 없어서 옷을 안 사나 싶어 쇼핑하자고 엄마가 예쁜 옷을 사준대도 한사코 거부한다. 이런 딸내미가 미웠는지 엄마는 때때로 “어휴! 몸 푼 여자 같다”며 날 비꽜다. 엄마의 비아냥에도 나는 보란 듯이 더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고, 빈 티 나는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런 나를 엄마는 남에게 사랑받지 못할 불쌍한 사람으로 보지만, 내 눈엔 코르셋으로 똘똘 뭉쳐 자신의 몸을 비하하는 엄마가 더 답답하다.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몸무게가 몇 그램 늘었는지를 재고, 끼니때마다 밥을 뜨는 숟가락질도 계산할 뿐만 아니라, 옷을 고를 때도 자신의 몸이 얼마나 ‘덜’ 뚱뚱해 보이는 가를 따진다. 엄마는 키가 크고 늘씬한 몸인데도 평생을 남의 시선과 기준에 갇혀 제 몸의 장점을 보지 못한다. 그저 남들 눈에 자기 스타일이 얼마나 멋지고, 자기 몸이 얼마나 늘씬하게 보이는지를, 칭찬을 가장한 품평을 타인의 입으로 확인받고 자존감을 채운다.
하지만 나에게 밥과 타인의 관심 중 뭘 고를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당연 밥을 고르겠다. 내가 외모로 돈을 버는 연예인도 아닌데 왜? 굳이?! 나 스스로 사회가 내세운 외모 코르셋 감옥에 갇히겠냐. 그럴 바에 밥 한 끼 더 편하게 먹고 건강한 돼지가 되겠다. 이런 나의 뚝심을 엄마도 받아들였는지 이제는 머리를 밀러 가겠다는 나에게 말한다.
“숏컷하든 뭐하든 제발 투블럭만 하지 마.”
아들 하나 더 생긴 것 같다더니만 나의 못생김이 극대화된 투블럭은 엄마도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그럼에도 이제는 딸의 옷차림이나 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으니 나는 엄마의 변화에 뿌듯함을 느낀다. 언젠가 엄마도 살이 불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밥을 먹고, 자신이 입었을 때 기분 좋은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