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다리의 설움이 이랬을까.
집안의 기둥인 엄마의 희귀병 진단
지방 병원들의 오진으로 목디스크로만 생각했던 엄마의 증상이 세계의 3%만이 걸리는 희귀병이라는 걸 알았을 때, 마침 나 또한 두 달째 지속된 대상포진의 후유증으로 퇴사 후 미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희귀병의 전문가인 담당 의사 선생님은 자신감이 넘치는 분이셨는데 그의 모든 말 한마디 한 마디가 확신에 차 있었다. 수술만이 통증을 없앨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수술 후 몸에 마비가 올 거다. 그러니 주변 정리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술 날짜를 잡으시라. 과연 서울의 큰 병원은 놀라웠다. 진단부터 수술 결정까지 모든 과정이 매우 신속하고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의 말들이 일으킨 울림과 진동은 잔상을 남기며 우리를 흔들어댔다.
사고로 아빠가 장애인이 된 후 가족 모두가 각자 견뎌내야 했던 인고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가족의 불치병 진단은 남은 가족 구성원들의 일상을 흔들고, 흔들다 못해 뒤집어엎고, 끝내 가정을 깨트려 버린다. 심지어 아빠의 사고 후 가정의 균열 속에서도 집 기둥을 받쳐 온 엄마였기에, 그녀의 희귀병 진단은 온 가족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지각변동과 같았다.
머릿속에 장애인이 된 엄마를 그려 보려고 노력하면 이미 장애인인 아빠가 엄마를 돌보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장애인 부부이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까? 글쎄... 내겐 도돌이표처럼 물음표만 떠올랐다. 엄마는 누구에게 기댈 수 있을까? 아빠의 사고 후 가족이 분열되는 혼란 속에서도 굳건히 가정을 지키려고 애쓴 엄마였기에, 엄마의 불운한 삶에 대한 슬픔과 신에 대한 원망, 그로 인한 분노가 나를 흔들었다. 결국 나는 미국 여행을 취소하고 엄마의 수술과 간병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성 암 환자의 이혼율은 남성 암환자의 4배라던데
아빠 대신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한 달 동안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사에게 희귀병 판정을 받았을 때부터 엄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눈에 띄게 겁을 내다가도 어느 순간 이상하게 자신이 넘쳤고, 그러다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서울에서의 수술과 그 후 지방 병원에서의 회복기까지 큰일을 치르고서도 후유증을 앓던 엄마는 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컸기에 간절하게 딸인 내가 제주에 남아주길 바랐다.
엄마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하는 원인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병의 진단부터 수술, 그 후 입원 생활까지 그 모든 과정에 엄마의 남편은 부재했다. 전신마비라는 후유증을 남길 수 있는 수술을 치르고도 아빠는 이틀이 지나서야 병원에 찾아왔다. 수술 후 4일 만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쫓겨나고, 회복을 위해 병원을 찾다 우여곡절 끝에 제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도 항공사가 요구하는 책임 각서에 서명한 것도 나였다. 제주로 돌아와 묶게 된 병실은 VIP 병실로 이제껏 내가 가 본 병실 중 가장 넓어 한 가족이 모두 다 잘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빠는 병원에 올 때마다 생필품만 채워주고는 그대로 돌아가곤 했다.
아픈 엄마는 차마 남편에게 기대지 못했기에 살기 위해 딸인 나를 붙잡았다. 결국 내 서울 자취방 살림은 공실로 몇 개월치의 월세를 내며 유지되다 주인의 손길이 다시 닿지 못한 채 완전히 정리돼 버렸다. 26살 제주로의 귀향. 생각지도 못했던 귀향은 내게 한 순간의 왕의 심기를 거슬려 받게 된 귀양과 같았다. 야심을 품고 올라간 서울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제주로 돌아왔단 무력감. 그 원인인 엄마의 투병 과정에서 아빠의 부재가 가져온 분노는 여진처럼 제주에서의 나의 삶을 흔들어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당연 제주에 온 후로 나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일방적 원망과 화풀이였다. 내가 너무나 악에 바쳐 있었기에 엄마와 아빠는 나의 지뢰를 밟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원망을 속절없이 받아내야 했다. 웃기게도 가족의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겐 엄마의 병 때문에 제주로 돌아온 내가 어느덧 ‘착한 효녀’가 돼 있었다.
고1 때부터 기숙사에 가 떨어져 살던 딸과 10년 만에 살게 된 부모님은 처음엔 딸과의 합가가 반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니 두 가구가 합쳐지는 일엔 꽤나 큰 진통이 따랐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닮았단 얘길 참 많이 들었다. 원칙주의와 고집 불통에 하다 못해 엄마의 결벽증과 강박증까지 닮았다. 오랜 기숙사 생활로 개인주의가 몸에 밴 나와 남의 손을 신뢰하지 않는 엄마는 슬리퍼를 놓는 방향으로도 다퉜다.
잦은 다툼과 몇 번의 고성이 오간 끝에 엄마가 ‘내 집이니까 내 규칙을 따라.’라고 했기에, 나는 씩씩대면서도 캥거루족 자식으로서 엄마의 생활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정의되지 않는 가사 규칙은 바로 ‘아빠의 밥상 차리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