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3년 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무려 20년 지기 비혼 친구로 나는 한때 그 친구가 세상에 없다면 ‘왼팔을 잃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표현해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호기롭게 제주에서 자영업에 뛰어든 사이, 내 친구는 워홀러가 되어 일본과 호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서러운 타향살이를 전전했고, 그렇게 나의 ‘왼팔’ 친구는 어느새 ‘왼손의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친구‘로 강등되었다.
그렇다고 그 소중함이 작아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제주와 시드니라는 물리적 거리를 두고, 아침형 인간과 야행성 인간이라는 상반된 시간대를 살면서도, 틈이 나면 말을 토해내듯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서로 제 할 말만 해서 대화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게 생기면 상대를 꼬시려고 애쓰는 훌륭한 영업 사원들이다. 영업 전략은 상대가 듣는 척을 할 때까지 계속해서 말하는 거다. 그렇게 친구는 호주에서, 나는 제주에서 서로를 자기가 있는 곳에 정착하게끔 유혹하며 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어쨌든 그런 친구가 가족의 경사로 한국에 휴가를 오게 됐고 귀한 시간을 쪼개 제주에 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석고상처럼 하얗고 반질반질했던 피부가 호주 태양에 까맣게 그을린 것에 신기해하며 서로 팔을 대보고 호들갑을 떨던 것도 잠시, 어느새 내 몸에 ’젊꼰‘이 빙의해 친구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의 불만은 친구가 똑똑한 머리와 성실함과 호주라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그 조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살포시 한 귀를 막고 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내가 타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명백히 ‘내로남불’이다. 사실 친구 또한 내 충고를 귀담아듣는 성향도 아니다. 이 잔소리는 지난 n년간 이미 카톡을 통해 여러 번 텍스트로 보내졌지만 내 친구의 눈에 잠시 걸렸다 흘러지나 간 말들이다. 어엿한 외국인의 제스처로 진절머리를 치며 온 몸으로 따분함을 드러내는 친구의 정신머리를 붙잡고, 가닿지 못하는 문장들을 쏟아내며 나도 학생들을 혼내던 직업병이 말기가 됐나 싶었다. 그럼에도 성격 좋은 친구는 “친구야 내일은 날 아껴줘. 나한테 잘해줘~.” 하며 짧은 점심을 마치고 돌아갔다.
친구와 헤어지고 지나오던 도로 양쪽에 물든 은행나무들을 보며 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다정하지 못했을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타국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친구에게 응원이 되는 소릴 못하고 왜 더 부담을 주는 말을 했을까? 나의 본심은 무엇일까? 잔소리는 나의 불치병일까? 질문들을 곱씹어보았다. 정말로 내가 친구의 삶을 응원한다면 친구가 그리는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선도 예쁘다고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줘야 했던 건 아닐까? 올바른 동기부여는 어떻게 하는 걸까? 마음이 꽤나 무거워졌다.
질문에 질문을 잇다 보니 걱정을 빙자한 쓴소리가 사실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미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표한 여행을 완료하지 못하고 중간 귀국했던 아쉬움이 짙기에 내 친구만큼은 후회없이 외국 생활을 누리길 바랐다. 이후 제주에서 자영업으로 성공해 친구를 제주로 부르고 싶다던 내 왜곡된 자아실현 욕망이 코로나에 걸려 넘어지면서, 불확실한 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친구에게 투영했구나 싶었다. 나의 제주살이가 친구의 호주살이처럼 점선들로 이어진 선이었다. 집도 직업도 불안정해 앞으론 N 잡러로 살아야겠지 하며 다가오는 2023년을 걱정하는 내가 학생 비자와 렌트 걱정을 하는 호주 워홀러 친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뭐가 떳떳하다고 친구를 혼냈을까.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다음날 만남에서 바로 친구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사실인즉 하반기 목표인 브런치 북 응모를 끝낸 뒤, 끓어오르는 나의 열정 에너지를 어디 쏟을지 자기 계발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내가, 미래와 자신에 대한 불안을 네게 반영해 혼을 낸 것 같다고 말이다. 내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실직을 우려하며 브런치를 시작하고 유튜브도 하고 싶다는 나를 지켜봐 온 착한 내 친구는 내 불안을 어렴풋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의 넓은 아량에도 불구하고, 이 자기반성의 효과는 너무나도 찰나였고, 결국 친구는 나의 강제적인 갓생 살기 투지에 전염된 척 함께 미래에 대한 포부를 다지며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며 다시금 친구를 떠올린다. ”나는 나름 좋았어. 지금에 만족해.“ 하던 친구의 얼굴을 그리며 미소 지어본다.
우리는 둘 다 잘살고 있다.
22년 11월 19일.